연중 15주일. 이사 55,10-11; 로마 8,18-23; 마태 13,1-23
요사이 화두(話頭)는 공정과 평등을 부르짖습니다. ‘기회의 균등’ ‘같은 눈높이’ ‘상식의 부합’, 그만큼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반증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나는 손해보고 싶지 않다’ 는 본심이 깔려 있습니다. 처음 들으면 그 말이 합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 살아보신 분들은 압니다. 하느님도 그리 공평해보이진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처럼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하시니까요. 예를 들어, 예수님이 12제자를 투표가 아니라 직접 부르시고요, 또 누구는 제자가 되고 싶어도 그 청을 물리치기도 하십니다. 기도를 해도 내 기도는 안 들어주실 때도 있습니다. 누구는 주님의 사랑을 더 받고, 누구는 그게 안되서 배반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공평하지 않은 하느님처럼 보이지만, 강론 마지막 즈음까지 들으신다면 하느님의 공평하심, 공정하심이 우리의 생각과 어떤 차이가 있고,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연 주님께서 우리가 어디까지 바라보기를 바라셨는지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비로소 알게 됩니다. ‘각자 처한 환경과 조건이 달랐음’ 을요. 누구는 세상이 평화로울 때, 누구는 전쟁통에 태어났고, 누구는 부자 집안에, 누구는 가난한 집안에, 누구는 맏이로, 누구는 막내로 등등.. 즉 출발 자체부터 난 선택할 수 없었고, 이른바 주어지면서 거기서부터 적응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천성(天性)이 달랐으니까요. 부모를 탓하고, 세상을 탓하는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주어진 이 환경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아등바등대며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고민을 힘들게만 여기면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 있잖습니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 요. 자기를 닫아버리는 사람들이죠.
며칠 전, 저녁 선선한 때에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쭉 보도블록을 따라 걷는데, 약간 오르막길에서 자전거를 끌고 가던 젊은 엄마와 4살 정도의 딸 아이가 있었는데, 아이가 ‘너무 힘들다’ 면서 칭얼대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조금만 더 가면 좋은 길이 나온다면서 설명하고 있었지만 신통치가 않습니다. 저도 초행길이라 앱 지도를 보며 걷고 있는데 몇분 후, 뒤에서 ‘까르르’ 하는 소리가 들리며 아까 그 모녀가 자전거를 타며 내리막길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앞서 짜증내던 표정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가본 길이었기에 그 길을 인도하며 설명을 했었고, 아이는 초행길에다가 오르막길로 다리가 아파서 칭얼거렸지만 결국 내리막길에서 페달도 안 밟고 쭉 미끄러져 내려올 때의 쾌감을 통해 모든 것이 설명되었음을요. 당장에는 이것을 왜 하는 지 모르겠고, 부당하게 보였지만 그 과정의 힘든 시간을 통해 무엇을 알려주고 싶었는지를 ‘지금 당장’ 이 아니라, ‘조금은 나중’ 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이렇듯 깨달음에는 ‘시간차’가 있는데요.
오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그 비싼 씨를 아무렇게나 마구 뿌립니다. 돌밭, 가시덤불 등 말이지요. 하지만 그는 어느 환경에 처했건, 그 땅이 나름의 소득을 키워내길 바라며 믿음을 가지고 뿌립니다. 여기서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나의 나름의 상태를 잘 받아들이며, 나 자신과 화해하는가? 내가 가진 땅의 토질이 좋아지도록 애쓰는가?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는 주님의 초대하심을 잘 준비하고 그 부르심에 바로 응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는가?’ 이런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우린 위기 속에서도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1독서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라는 말씀은 우리의 준비된 나름의 상태에서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고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당신의 공평하심이 보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해보입니다. 하지만 자신과 화해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공평하심이 보이고, 나는 여기서 남과 다르게 평안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