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2020. 1. 17. 오전 7: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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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1사무 4,1-11; 마르 1,40-45

  많은 이들이 배우기 위하여 이곳저곳을 찾아다니고 나를 가르쳐 줄 선생님을 고릅니다. 그런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가 좋고 사제관계의 합()이 좋다면 다행이건만 상황은 꼭 그렇게 흐르지만도 않습니다. 오히려 사정이 안되거나 하여 홀로 깨달아야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사이 사람들은 학교, 학원이건 인터넷 강의건 어떤 제도적인 틀의 학습상황을 갖춰야 한다고 믿는, 식견의 짧음을 만나는데요. 왜냐하면 우린 유한하지만 한편으로 하느님을 통해 무한할 수 있는 경지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이한 안토니오 아빠스가 사막생활을 통하여 은수자로서 그런 깨달음의 구현을 얻은 것처럼 말입니다 삶은 자기와의 싸움을 동반해야 합니다. 양심을 점검하며 자주 짓는 과오에서 벗어나야 하고요. 다가오는 유혹이 나를 살릴지, 망칠지를 알아채야 합니다. 마치 곤충의 더듬이처럼 자기 자신을 민감하게 바라보며 관리해야 하는데요. 그럴 때 다가오는 제의가, 선한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서에서 보듯 사람들은 사무엘에게 임금을 세워달라 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참된 임금은 누구십니까?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뿐이시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나라처럼 그럴 듯하길 바랍니다. 왕을 추대하고 세워서 자기를 다스려줄 임금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기도를 해온 사무엘은 알고 있었지요. 그렇게 세운 임금이 자신과 백성을 어떻게 망쳐갈 지를요. 권력에 취한 왕이 무엇을 할 지도요. 이미 우리도 역사공부를 통해 알고 있는 얘기지요. 하지만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못 먹어도 go’를 외칩니다. 하느님도 이들의 의도를 아시지요.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일은 본당에서도 빚어집니다. 세상에서 hot 하다는 아이템을 들고 와서 성당에서도 이런 것을 해달라는 요구입니다. 하지만 이미 알지요. 그 요구를 수용하다가 교회라는 본질을 흐리게 만들 수도 있음을요. 집중하고 몰두할 중심과, 없어도 되는 부수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가끔은 그런 시도가 감동을 빚어내기도 합니다.

복음처럼 중풍병자 한 명을 고치고자, 사람들이 남의 집 지붕을 벗기고 들 것을 공중에 달아 내리는 사람들의 믿음과 치유를 바라는 간절한 자세를요. 사람을 살리고픈 마음이 오히려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죄의 용서와 몸의 완치를 이뤄주시는데요. 어떤 때에는 제도를 벗어난, 차원이 다른 기도를 통해 모두를 살리는 길을 선택하기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린 늘 제도를 벗어난 새로운 상황을 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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