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드디어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인사 나누겠습니다.. 성탄을 축하합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의 머리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 듭니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공부를 잘하고 많이 한 사람일수록 질문을 많이 하는 이유는, 자기 머리로 그것을 이해해야만 안다고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저 묻는다고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이 사건은 인간의 머리를 넘는 신비의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인인 안셀무스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은 믿기 위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라고요.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무리 머리로 신앙에 대해 알려고 들어도, 첫 출발이 안 되어 있다면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인데요.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라는 말씀처럼, 당신의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현시키고, 약속을 지키시려고 오늘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여기 구유의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어떻습니까? 미니어처처럼 이쁘게 장식되어 있는 구유 앞에서 기도를 하고 경배도 드리지만, 실은 굉장히 처참하고 불쌍한 장면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실상은 애를 낳을 방이 없었지요, 아기가 놓인 곳도 짐승의 여물통입니다. 양부인 요셉은 방을 구할 능력도 없구요. 산모인 성모님은 산후조리 상태가 심각합니다. 이건 축하 받을 장소라 보기엔 너무 비천하고, 왕이 되어 오실 분의 탄생처라고 하기엔, 요즘말로 너무 굴욕적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구하러 오실 임금님이 그 좋은 곳을 마다하고 베들레헴 시골, 하필이면 말구유에서 탄생하셨어야 했을까요?
이제 우린 교리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대답만 잘하는 단순함을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이 왜 그러셨을까?’ 라고 자꾸 물어보는 자세가, 신앙을 성장케 해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왜 이런 어려운 곳에서 태어나셔야 했을까?’ 라고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유한함에 갇힌 우리가, 영원의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공손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공손함이란, 바로 ‘근원에 대한 진지함’ 입니다. 이 자세를 지닐 때 다 헤아리지 못하는 신비로움의 접근을 더 잘할 수 있게 해주고요. 우리의 몸부림치는 간절한 질문 속에서 주님은 우리를 가엽게 봐주시며 응답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우린 매년마다 당신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올해 성탄절, 당신의 탄생 신비는 어떻게 다가오시는지요? 이제 그 대답을 당신께 말씀드리십시오. 주님은 그 답을 기다리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