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3주일. 이사야 35,1-10; 야고 5,7-10; 마태 11,2-11
여러분께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나는 기다림의 단어가 어찌 들리십니까?’
기다림=답답함입니까? 기다림=버퍼링입니까? 아니면 기다림=불안함입니까? 기다림=설레임입니까? 각자 주어진 환경에 따라 달리 느끼시겠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서 ‘기다림’ 이란 단어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들릴 때가 많은 요즘입니다. 일단 당장에 이뤄지지는 않으니까요. 언제까지인지 몰라도 무반응 상태를 견뎌야 하니까요. 하지만 무엇이든 때가 있고, 과정이 필요하지요. 내가 먹고 싶은 밥이 되려면 쌀을 씻고 밥통에 넣어서 조리되는 과정이 필요하고요. 내가 키우는 아이도 어느 정도 커서 사춘기도 지나고, 생각도 깊어져야 어른다운 대화가 가능하고요. 기도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잠해지는 시간이 흘러야 당신의 메시지를 알아들을 수 있는데요. 그러면 기다리는 상태를 꼭 부정적인 상황이라 볼 수는 없겠지요. 필수불가결한 시간인데요. 하지만 우리 마음이 꼭 그렇지는 않지요. 복음처럼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기다리기 힘든, 또는 과연 약속된 분인가? 알쏭달쏭한 상황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다 알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인데요.
오늘 저는 핑크색 제의를 입고 있습니다. 이런 색깔을 입는 이유는 희망을 가지고 용기를 내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희망과 무슨 용기요? 바로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것처럼 여겨져도, 우리는 그 약속을 믿는 이들이기에 잘 견디자는 것입니다. 독서도 그런 내용입니다. 1독서는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2독서는 “땅의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도시인들이라 기다림에 대해 그다지 익숙하지 못합니다. 상대방의 메시지나 sns 답변이 늦으면 별별 상상을 해댑니다.
여기서 재미삼아 주말농장이나 낚시라도 해보신 분들은 압니다. 그것을 이뤄주는 시기와 때는 따로 정해져 있는데요. 하지만 땅을 믿고 계속 버티고 기다리면, 뭔가 수확을 얻을 수 있는데요. 여기서 우린 이런 답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속하는 대다수의 것들은 상황이 달라지면 변하는 것들 투성이다. 하지만 주님의 약속은 내가 예상하는 시간의 개념과 달랐을 지언정, 그 날은 비로소 오고야 말고, 나는 살아있을 때 뭔가를 해야만 한다.’ 아직은 우리가 살아있습니다. 살아있다는 말은, 다시 말해 아직 해보지 않은 것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단어입니다. 예전에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화해할 수도 있고요. 감히 시도하지 못한 일이나 사랑을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자선주일을 맞이하여 아직은 살아있는 우리가 뭔가 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남들과 나 자신을 살렸으면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오셨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