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말라 3,19-20ㄴ; 2테살 3,7-12; 루카 21,5-19
한국이라는 나라를 살면서 이 나라가 어떤 나라를 롤 모델(roll-model)로 삼는 것 같습니까? 바로 미국이지요. 예전 원조를 받았던 때를 되살리며 복지가 좋다는 유럽도 아닌, 미국을 택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미국 방식’이 어떻습니까? 좀 더 세밀히 들어가서 ‘미국식 부의 복음화’ 의 내용이 뭡니까? 부유한 것이 복된 삶이요, 가난은 달갑지 않은 것이라 은연중에 세뇌당하고 교육받아왔습니다. 물론 물질의 부유함, 경제적 부유함 자체는 선(善)함도 아니고 악(惡)함도 아닙니다. 문제는 잘못 사용했을 때, 비난을 받는데요. 그럼 여러분께 질문 드려보겠습니다. ‘지금의 경제활동과 물질적 진보가 인간과 사회질서에 이바지 하고 있습니까?’ 여기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드실 겁니다.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잘사는 나라가 된다는 게 무슨 문제냐? 하시겠습니다만, 실제 여쭤보고 싶은 것은 이거였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쥐고 있는 것이 과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눠지고 분배가 잘되고 있습니까?’ 라고요.
오늘은 연중 33주일이면서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다음 주 전례력의 연말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사는 이곳이 하느님 나라의 시작과 진행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로 시작하는 마태오 복음 5장의 산상설교, 행복선언이 무엇인지를 여러분은 아십니다. 그분의 가르침의 정수요, 하느님 나라는 이러이러한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하고, 보상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는데요. 즉 주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러 지상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지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진 자들의 세상이고, 그들이 가진 기득권을 나누지 않으려는 행태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계속 이렇게 진행되어야 할까요? 무력으로나 법적으로 몰수할까요?
오늘 복음의 첫 장면은 몇몇 사람이 성전을 보며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 며 경탄을 하지만 예수님은 초를 치듯 말씀합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진짜로 서기 70년 경 다른 민족들이 쳐들어와 성전의 서쪽 벽, 이른바 통곡의 벽만 남은 채 다 무너지지요. 즉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영원한 곳이 아닙니다. 과정 중에서 흘러가는 삶이지요. 그럼 무얼 해야 할까요? 2독서에 나옵니다. “아무에게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의 말씀이 떠올려집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휴식을 하신 최초의 ‘노동의 복음’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일하고 계십니다. 그로인해 우리가 세상에 나온 것처럼요. 예수님도 노동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침을 펴시자 사람들이 말하지요. “저 사람은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목수의 아들이라 불린 예수님은 복음을 말로만 전하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처럼 손에 흙 묻히고, 몸에 땀 흘리며 일하셨습니다. 이런 ‘노동하는 인간’은 사람의 원초적인 모습이고요. 이것은 당신이 인간의 노동을 이해하고 존중하신다는 것을 삶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은 신성합니다. 물론 힘겹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노동의 수고로움을 견디시면서 노동 자체에서 솟아오르는 ‘새로운 선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노동을 떠나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선함인데요. 이런 모습은 자기 자신을 살려줍니다. 루카 복음 9장에 보면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자신을 잃는다” 는게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우리가, 사람다움을 잃는다는 건, 자기를 잃어버린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사람 같지 않으면 그 다음은 어떨까요?
사랑하는 상도동 본당 교우 여러분
주님의 선한 정신을 찾고 그분의 수고로움을 따르는 이들은 비록, 어려워도 쉽게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에게는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려주실 것” 이고요. 그러면서 주님 안에서 가난한 우리가 자신을 돌보고, 이웃의 아픔을 공유하며 나누는,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갈 수 있는데요. 여러분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서로를 돌보며 하느님의 나라를 잘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