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9주간 화요일
제가 신부로 살면서 ‘싸워나가야 할 점’ 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신부는 평탄한 삶이면 안됩니다. 그런 안주(安住)함은 오히려 영적인 메마름으로 이어집니다. 계속 현실과 항거하며 가야만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찾을 수 있는데요. 이것을 본당에 한정짓자면 그 싸움은 ‘신자들을 향한 질책과 나무라는 형태’ 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신자들은 ‘신부님이 무섭다. 까칠하다’ 등의 반응을 보이지요. 하지만 실상 많은 신부님들의 싸움은 이것이었습니다. ‘신자들 안에 있는 이기주의, 욕심, 비복음적인 자세’ 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 신자 안에 있는 영혼의 불완전함, 주님을 멀리하려는 자세’ 에 대한 꾸짖음과 충고였는데 실상 많은 분들은 ‘나를 싫어하시나보다’ 라고 여기지요. 하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데요. 그래서 우린 자신의 상태를 잘 봐야 합니다.
독서 내용이 그것이었습니다. 모든 문제의 시작은 ‘한 사람’을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작은 ‘아담’ 이었죠. 그는 하느님과 닮았으나 우리처럼 불안정했고, 욕심에 기울어집니다. 그로인해 죄, 범죄, 죽음이 들어오지요. 그 욕심은 한편으로 유혹이기도 했지만 그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객관적이다’ 라는 생각을 하지만 실은 꼭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中庸)’이 필요합니다. 중용은 ‘화살로 과녁의 중심을 맞췄을 때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상태입니다. 이게 되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냉철한 지성’이 요구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얼마나 냉철한 시각으로 보십니까? 대부분은 몇 번 해보다가 관둡니다. 힘들다면서, 그러면서 당장 느끼는 기분대로 움직이지요. 그게 편하니까요. 하지만 그 편함이 오히려 자신의 눈을 멀게 하고 죽이게 만드는 것이라면 어쩌실 것인가요? 그래서 복음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이들은 늘 준비합니다. 자신을 관리하고, 나의 주인인 주님이 뭘 원하시는지 연구하고 자신의 영혼을 점검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100%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도 불완전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주님은 그런 그에게 당신을 보여주시고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인 은총”을 주시지요. 그렇다면 불완전이 불완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관리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인데요. 그것을 얻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