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4주일. 탈출 32,7-14; 1티모 1,12-17; 루카 15,1-32
뭔가 잘 안 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이런 것이지요. ‘내가 하느님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대답에 대해 만약, 내가 명료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굉장히 헷갈리실 것이구요. 이른바 나름 신앙생활을 몇 십 년을 했다 하더라도, 별 진전이 느껴지지 않아서 힘이 빠지실 텐데요. 이제부터 독서와 복음에 나온 인물들이 하느님을 어떤 방식으로 알고 있었나? 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1독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하는 장면입니다. 이들이 왜 이러고 있을까요? 분명 그들은 하느님의 힘을 체험했습니다. 하느님이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완고한 이집트 왕 파라오의 마음을 바꾸셔서, 그들은 거기서 나올 수 있었고요. 막다른 홍해바다에서 마른 발로 건넜던 기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럴까요? 그들은 온갖 하느님 체험을 했지만 자기들이 원한 방식이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쉽게 표현하면 이렇지요. ‘저희를 거기서 꺼내주셔서 고맙긴 한데요. 하지만 계속 이런 방식이라면 좀 곤란합니다~ 왜냐면 지금의 방식은 우릴 지치게 만들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각자 갖고 있던 금, 은 보석을 모아 주조하여, 우상을 세우고 거기에 절을 하지요. 지금의 하느님보다는 자기 말을 들어줄 그 무언가가 더 필요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었을까요? 하느님의 계획하신 빅 픽쳐(big picture)를요. 그들에게는 지금처럼 힘든, 광야생활과 사막생활은 필요했습니다. 참다운 하느님이 누구신지 아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자기들이 바라는 소원 따위나 들어주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라는, 그런 신관(神觀)으로 바라보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끔요.
복음은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간 이유는 이렇습니다. 어차피 자기 말고 형도 있으니, 자기 소유로 돌아올 유산의 일부를 먼저 챙기는 게 이득이라 여기면서, 그 액수만큼의 재물은 온전히 자기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했지요. 원하면 더 큰 것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요. 아버지는 자기 생각보다 큰 부자셨는데, 자신이 생각한 만큼의 재물만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던 거지요. 큰 아들도 그렇습니다. 이른바 모범생입니다. 불만이 있어도 아버지 옆에 붙어있습니다. 어떻게든 붙어있으면 뭔가 얻으리라 여겼겠지요. 그래서 엇나갈 생각도, 시도도 하지 못합니다. 요사이로 말하자면 ‘아버지 등골 빼먹는 스타일’ 이죠.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다 먹겠다... 하지만 그도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잘 몰랐습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무엇이 보이시는지요? 그는 아버지 곁에서 많은 것을 보고 자랐으며,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까지는 헤아 리지 못했지요. 그저 자기 방식으로만 아버지를 봤습니다. 같이 있으면서 아버지와 함께 모든 것을 나누고, 아낌없이 그것들을 사용하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었는데, 그는 불만에 가득했고 기뻐하지 못했으며, 감히 그런 얘기조차 꺼내지 못한 자신감이 부족하고, 이해심이 결여된 사람이었습니다. 2독서의 바오로도 그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 그는 “모르고 한 일” 이라고 말하지만 글자 그대로 다 믿으시면 안됩니다. 그는 율법학자이며 바리사이였습니다. 구약의 나오는 하느님이 어떻게 구원을 펼치실 지 배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대한 판을 읽지는 못했습니다. 이른바 ‘수학공식은 알고 있었지만 그 공식에 따른 해당 문제는 풀지 못했다’ 라고나 할까요? 다른 이보다 알고는 있지만 현실 적용은 하지 못했음을 그는 주님과의 체험 이후에 고백을 합니다.
젊은 시절, 방탕한 시절을 겪고 고백론을 쓴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님도 이런 말을 했지요. “늦게서야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토록 예스럽고 그토록 아름다움이신 당신을 늦게서야 사랑했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은 내 안에 계셨으나 나는 밖에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밖에서 찾으려고 했으며, 당신이 만드신 사랑스런 피조물들로 나의 마음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그것들 때문에 나는 당신을 찾지 못했지만 피조물은 당신의 힘이 없이는 전혀 살 수 없을 것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밖에서 번쩍거리는 화려함에 눈이 팔려 살지만, 실제로 찾아야 할 것은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신 당신이 심어주신 진정한 본질을 깨달을 때, 하느님을 오해하지 않을 수 있는데요.
사랑하는 상도동 본당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느님을 어떤 방식으로 오해해 왔습니까? 그저 어느 만큼 정도로 여겨왔습니까?그분은 우리가 생각한 예상보다 더 크신 분인데요. 그 이상의 것도 주실 수 있는 분이신데요. 그렇다고 여러분이 주님을 그동안 오해해왔다고 자괴감까지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는 말씀처럼, 당신은 우리의 편협함을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길 바라시니까요. 그런 시간을 통하여 주님을 더 잘 이해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럼 잘 풀려나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