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예레 1,17-19; 마르 6,17-29
여러분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반응은 여러 가지이지요. 누구는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하는 분부터, 하느님이 두렵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사람들의 반응, 그러니까 ‘나를 어떻게 봐줄까?’ 하는 문제에 대한 두려움, 내가 해놓은 일에 대한 남들의 반응에 대해 조바심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요.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지요. 대다수 사람들은 자기가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려고 합니다. 내 기준에 맞으면 좋다고 여기고요. 시대에 흐름과 맞지 않으면 좋지 않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그럼 내가 가진 기준이 뭔데요? 세상이 말하는 흐름이 과연 옳은 선택만을 하고 있었을까요?
오늘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을 맞이하며 이 시대에서 필요한 순교가 어떤 것인가?를 봅니다. 저는 이 시대의 순교자는 ‘내부 고발자’ 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이 제일 잘 알지요. 그게 비록 잔소리일지언정, 올바른 목소리는 가장 가까이에서 들려오고, 관심 써주는 사람도 사실 그들입니다. 마치 가족이나, 함께 일하는 공동체원처럼요.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그들을 멀리하다보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더 나아가 그를 더 이상 돕지 못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내부 고발자 같은 사람이 처음부터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단체가 자정능력을 상실할 때,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다다르면, 누군가에 의해 시작됩니다. 누구는 이것을 귀찮다고 여기고, 누구는 목소리를 내길 두려워합니다만 가만히 있다고 해결되지 않지요.
하느님이 예레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명령한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진정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더 이상 사람들의 반응이 아닙니다.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목소리를 내야 할 때 내지 못하고, 겁에 질려버린 내가 되지 않길 두려워해야 하는데요.
1891년 레오 13세 교황님에 의해 반포된 ‘새로운 사태’ 이후 생긴 사회교리가 있습니다. 농업중심산업에서 산업혁명 이후, 제조,생산 중심산업으로 바뀌면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문제’ 가 대두되었습니다. 이미 1833년 당시 영국 의회 발표에는 ‘일곱 살 아동이 오전 6시부터 밤 9시까지 일하는 현장’ 을 고발했습니다. 헌데 이런 긴 시간의 노동이 요새와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누구는 말하지요. ‘종교는 종교답게 사회문제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요’ 그럼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든 것은 누굴까요? 사람처럼 살게 해주는 세상을 만들어줘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린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람을 제대로 여겨봐주고, 불합리하면 목소리를 제 때 내야 하지요. 우리가 이 신앙을 살면서 겁쟁이로 살면 안되는데요. 그것이 오늘 말씀의 메시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