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주일.

2020. 1. 25. 오후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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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3주일. 이사야 8,23-9,3; 1고린 1,10-13,17; 마태 4,12-23

  방금 들으신 말씀을 들으며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기운이 솟습니까? 희망이 보이십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개인적인 문제에 사로잡혀서일까요? 아니면 이 메시지가 무언지 몰라서 그런 것일까요? 물론 기쁨과 즐거움은 강요될 수 없지요. 여러분이 직접 느끼고 체험하셔야 하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주는 메시지의 의도가 무언지를 알려드린다면 답답함이 사그라질텐데요.

  오늘 말씀은 1독서와 복음의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이 중복되며 나옵니다. 옛날에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 바다로 가는 길과, 요르단 건너편과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예전에는 주목을 받지 못한 지역이었지만 나중에는 그 곳에 사는 이들이 기쁨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화답송에는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라고 응답하고 있고요. 알렐루야는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셨네 라면서 노래합니다. 즉 이 말씀이 수긍이 가고, 이해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하신 말씀이, 내 삶에서 현실적으로 어떻게 이어지는 지를 아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요. 즉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고 말은 하는데, 현실적으로 내가 기쁨을 못 느낀다면.. 무엇이 나를 기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 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주일미사를 왜 나오십니까?” 그러면 예전에는 신자의 의무이니까요..’ 라는 답변이셨지만, 요사이는 주일미사를 통해 힘을 얻고 싶어서요 라고 전보다는 바람직한 답변이 나옵니다. 여기에 저는 과연 교우분들이 얻고 싶다는 그 힘을 어떤 방식을 통해 얻고 계신가?’ 하는 점이 궁금합니다. 개인차가 있겠습니다만, 좀 우려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제 앞의 것이 잘 치워지게 해주십시오. 내가 시간과 정성을 들여 기도를 이만큼 했으니, 당신이 이 정도는 해주셔야 하지 않을까?..’ 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는 단순히 현실적인 차원에서만 머물게 되고요. 눈 앞에 것만 연연하게 됩니다. 물론 우린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하는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잘못된 기도라고 할 수는 없고요. 기복신앙도 자연스러운 형태의 기도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진정 봐야 할 관점의 방향은 삭제되어 있는데요. 기도가 방향을 잃으면 어찌 되는 지 아십니까? 아주 인간적인 수준의 차원에서 머뭅니다. 그런 모습이 2독서에 나오지요. 바오로가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클로에 집안 사람들이 나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케파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편 가르고 라인을 형성합니다. 이른바 같은 신자 안에서도 줄긋기 작업을 하지요. 한편으론 서로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하겠지만 사실 공동체란, 하나의 목표가 세워진다면 그것을 위해 서로 갈라지지 않는 것이 공동체인데요. 예전에 본 다큐멘타리 장면 하나를 소개합니다.

  ‘상어들은 보통 한 마리씩 다닙니다. 떼로 몰려다니는 예가 없습니다. 헌데 그 날은 상어 몇 백 마리가 한 곳에 집결하였습니다. 이유는 그 곳을 지나가는 멸치 떼를 사냥하기 위해서입니다. 서로가 영역을 짜고 멸치를 몰아서 사냥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먹을 만큼 먹어치운 상어들은 다시 조용하게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던데요.’

 같은 목적을 위해서 상어도 이럴진대 우리 공동체는 어떻게 목표를 추구해야 나가야 할까요? 각자 살던 삶의 모습은 다 다릅니다. 하지만 구원을 위한 목표는 이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방법을 나도 적용해보면서 성당에 와서 미사를 거행하고 봉사활동과 단체 활동을 하다보면 ~ 주님의 보여준 삶이 현실상으로 적용이 가능하겠구나~’ 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 차원은 단순히 미사만 참여하는 분들과는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서로 어울리다보면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음을 서로가 실행해보고 관찰하며 체험할 수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상도동 본당 교우 여러분

 복음에는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자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고 나옵니다. 그들은 평소 밋밋하고 평범하게 살았었지만 그안엔 뭔가를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촉진제와 상황을 만들어주신 분이 예수님이고요. 평범한 삶을 살았었지만 기도와 내재된 갈구가 주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삶이 그렇지요. 누구는 예전과 똑같이 살지만 또 누구는 알아채고서 기회를 기회라 엿보고 그걸 잡지요. 그걸 알아챌 시각이 열려있습니까? 알아챌 감각이 있습니까? 그걸 선택할 용기가 있습니까? 그것이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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