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2019. 4. 27. 오전 11:5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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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사도 5,12-16; 묵시 1,9-19; 요한 20,19-31

  오늘 복음은 토마 사도의 약한 믿음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며 평소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토마 사도는 약한 믿음을 가졌다. 그러니 오히려 보지 않고 믿는 우리가, 더 열심하니 계속 열심한 신앙을 가지자 고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단순하게 믿느냐?, 아니냐?’ 의 이분법적으로 바라볼 사항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가 섞여 살고 있고요. 이른바 신앙인들도 처음부터 믿으면서 시작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믿는다 하더라도, 다 열심하지도 않고요. 게다가 비신라고 하여 모두가 하느님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즉 이 세상은 신앙인이나 비신앙인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간입니다. 그러면 모두에게 열려있는 이곳에서 우리 신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믿음을 표현할 때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믿는 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는 없다 는 점입니다.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도구는 말이나 행동입니다. 말이나 행동이 무언가를 지시하고 의도한 것을 표현해주긴 하지만, 이 도구를 누구나 자유자재로 원활하게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말이나 행동은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는 한계가 있는 제약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믿으려는 신앙이란, 나의 생각을 넘어서는 신비로운 관점을 열어놓을 때에야 비로소 만날 수 있다 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히 나의 생각을 넘어서는 신비로운 관점에 다다를 때 겪게 되는 과정은 바로 의심입니다. 의심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도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비록 우리가 아는 복음은, 부활이란 체험 이후의 상황을 묘사했기에 토마 사도의 약한 점이 유독 도드라지게 부각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의 이런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단언하기에는 이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런 시절을 겪었구요. 우리보다 더 대단했던 사람들도 겪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두 성인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한 분은, 가르멜 수녀회 출신의 소화 데레사 성녀입니다. 이 분이 살던 1885년 은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이 시대를 강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는 시대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어둠의 체험을 겪었고요. 데레사 성녀도 하느님을 의심하고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겪는 아픔을 공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믿지 않는 이들을 기도속에서 만나며 그들을 형제요, 자매로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연대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약함과 아픔을 이해하기 때문이지요. 믿지 않고, 믿지 못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이러한 몸부림은 절대자인 하느님을 만나고픈 몸부림인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분은, 우리나라에도 오신 인도 캘커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입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며 깊은 신심과 이웃 사랑의 모범으로 평가합니다만, 한편으로 성녀의 내면은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괴로움이란, 자신이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 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겐 내색하지도 않았고요. 내색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아팠습니다. 자신이 말하는 것을 정작 자신이 더 이상 가깝게 체험하지 못했다 는 그 모순에 대해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자신을 거절하고 원치 않는 것처럼 여겼고요. 그 허무함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이 성녀가 느낀, 하느님이 안 계신 것 같다는 체험은, 오히려 모든 인간에게서 예수님의 얼굴을 알아보기 위한 조건이 되었고요. 사람들을 자비로 대하는 조건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가난을 본인의 몸으로 더 경험하였고요. 그 가난 속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고통을, 본인의 생활 터전을 통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해 갑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하느님을 더 가까이 만나고 인식하게 되셨는데요.

  사랑하는 상도동 본당 교우 여러분

  하느님을 믿는 사람도, 하느님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하느님이 안 계신 것 같다는 체험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여기서 비신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체험을 만납니다. 당신을 만나고픈 갈망을 밑바탕에 깔고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자들처럼 자신이 당장에 느끼지 못하기에 하느님은 없다 라고 섣부른 판단을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분을 다 표현할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더 만나고픈 갈망이 오히려 자신을 살려내는데요. 그래서 토마 사도는 자신의 갈망을 이렇게 표현했지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 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이 말은 단순하게 봐야 믿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당신을 만나고 싶다는 갈망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당신을 보여주시며, 토마의 갈증을 해갈시켜주시지요. 우리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당신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두 분의 성녀가 주님을 만나서 성인이 되었듯이, 우리도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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