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사도 5,27-33; 요한 3,31-36
우리의 생각을 좌우하는 요소 중 하나는 첫인상입니다. 첫 느낌을 중시하다보니 생길 수 있는 문제는 처음에 느낀 것이 전부가 아닌 경우가 있는데도, 그것에 매달리거나 벗어나지 못해서 후회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요사이 1년 정도를 청년들과 복음 나눔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남 앞에서 털어놓는 게 쉽지 않는 세상이라지만 그렇게 털어놔야 되는 것도 있는데요. 어떤 친구가 말합니다. ‘저는 그동안 제가 믿음을 잘 가지고 있다고 여겼고, 스스로도 자랑스럽고 잘하고 있다고 여겼지만, 이번 성주간을 지내며 믿음, 순종을 갖기란 단순하지 않다는 느낌,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 이야기 합니다. 이 청년은 매주 성당 활동도 잘하는 열심한 친구입니다. 헌데 이번 부활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신앙이 너무 당연하듯 여겼던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이 된 모양인데요.
그렇지요. 가끔 자신의 상태를 봐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여전히 갇혀있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른다.” 그들은 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했을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현실을 더 사랑했다’ 는 점일 것입니다. 물론 우린 현실을 살아야 하지만 현실에만 집착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하느님이 귀찮지요. 다른 생각을 하느님이 부담스럽습니다. 당장에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나를 바꾸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오늘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매일미사에도 잘 나오듯, 이 분은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을 벌이셨습니다. 아리우스의 교리는 ‘예수님은 신성을 가진 분이 아닌 인간일 뿐이며, 하느님의 중간적 존재’ 라는 교리였습니다. 이 교리는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참 듣기 편하고 이해할 만하며, 사람들이 원하는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문제였습니다. 하느님을 자기가 아는 정도로 격하시켜서 알아들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넘어서는 ‘신비의 영역, 초월이 가능한 분’ 임을 알아듣기 어려워했기에 그 정도 수준으로 축소된 것에 만족한 믿음이었고요. 결국 진정한 분을 만나지 못하게 만든 가르침이었기에 당시 여러 번 유배를 가면서도 아타나시오 성인은 참된 가르침을 설파하셨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포도’ 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우가 자기 키보다 높은 포도를 먹으려고 시도를 하지만 포기하면서 이런 말을 남기죠. ‘저 포도는 신 포도일 거야’... 자기가 다다르지 못했다고 속단하고 결론내리는 자세는 주위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할 것이고요. 결국 사람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데 말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