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4주일. 여호 5,9-12; 2고린 5,17-21; 루카 15,1-32
신부로 살면서 참 많은 분들을 만납니다. 면담이나 고해성사를 통해 속 깊은 이야기를 듣고요. 여러 스타일을 가진 분을 봅니다. 참으로 다양하고 많은 면을 보아왔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기쁘기도 하고요, 슬프거나 안쓰럽기도 하고요. 화가 나기도 하고요. 때론 애잔한 마음도 듭니다. 여러분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시며 무슨 생각이 드시는지요? 교우들에게서 많은 모습을 발견합니다. 마치 복음에 나온 큰 아들처럼 말 잘 듣는 모범생이 있는가하면, 작은 아들처럼 막무가내 사고뭉치도 봅니다. 그렇다고 모범생이 좋고, 사고뭉치가 꼭 말썽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모범생이 말은 잘 듣는 반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이 고지식하기도 하고요. 작은 아들처럼 사고는 치긴 해도 어떤 때에는 화끈하게 일사천리로 일을 하여 시원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다들 이래도 우리 신자요, 저래도 우리 신자인데요. 그러면서 큰 아들, 작은 아들을 바라보았던 관심이, 이젠 아버지가 보여준 모습으로 점차 눈길이 바뀝니다. 현재 아버지, 어머니로 사시는 분들, 혹은 어떤 단체의 단체장이나 대표로 계신 분들은 이 마음이 무슨 마음일지 아실텐데요.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온다는 말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순간 아들이 돌아온 것이 정말 기뻐서 저러는지, 아니면 돌아온 아들에게 더 미안한 마음이 들도록 하려고, 이른바 멕일라고 저러는 지, 어리둥절 할 수 있습니다만, 확실한 사실은 큰 아들이 심통을 부리는 모습에서 아버지의 진짜 심정을 알게 됩니다. 큰 아들을 달래며 이렇게 말하지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늘 같이 있던 큰 아들의 소중함을, 아버지가 몰랐을 리 없습니다. 곁에 있어줌에 대해 표현이 둔탁했을 뿐, 고마웠을 것입니다. 늘 같이 있는데 재물이건, 사랑이건, 함께 나눌 존재는 누구도 아닌 바로 이 아들뿐이지요. 하지만 아들은 늘 곁에 있었건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모범생의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 있었을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듯” 조금은 무덤덤하고, 별 탈 없는 시간이야말로, 어쩌면 그 시간이 행복이었을 것입니다. 여기 계신 교우분들처럼 말이지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교우들을 보면서도 그런 마음이 드는데, 저희를 낳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은 더 했을텐데요.
이제 우리도 점차 아버지의 마음으로 옮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아직은 내가 여기기에 부족해 보이는 가족이나, 같이 일하는 직원들을 향해 더 큰 사랑을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