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6주일. 예레 17,5-8; 1고린 15,12-20; 루카 6,17-26
2013년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에서 조사를 했답니다. ‘직장인들이 직장생활을 얼마나 활기 없게 생활하며, 왜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가?’ 를 묻는 세계직장보고서라는 것을 작성했답니다. 총 142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했다는데요. 여기에 따르면 캐나다는 76%가 일에 집중을 못했으며, 미국은 75%가 집중하지 못했고, 최악은 일본인데 97%가 집중하지 못했답니다. 이 수치대로라면 무응답자를 제외하고 겨우 13%의 사람만이 일에 전념을 한다는 것인데요. 이렇게 되면 직장뿐만 아니라, 개인 삶에도 혼란이 생기지요. 그러면서 갤럽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세계적으로 직원의 절대다수는 일할 때 ‘전념하지 않거나’ 또는 ‘실제로 이탈한다’ 이는 그들이 감정적으로 직장과 단절되어 있으며, 생산성이 떨어지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서른 살에 육박하는 90년생들도 직장에 자기 삶을 올인하지 않습니다. 이미 할 일이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기 때문이고요. 그리고 일단 직장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이미 수시로 해고가 되는 현실에서 무슨 충성을 하겠습니까?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낫다고 여깁니다. 먼 행복보다 오늘의 행복을 바라니까요. 자~ 현실이 이렇다면 이제 무엇이 필요할까요? 예전에는 일에 파묻혀 살며 일 속에서 행복을 얻었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예전 분들보다 정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직함이란, 본능에 더 충실하다는 것입니다. 그 본능이란, 감성적 욕구를 통하여 현실에서의 행복을 바랍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자기가 바라는 것을 추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한 인간으로 성장하려면, 자기중심적 존재에서,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는 존재가 되어갈 때, 본성이 건강해진다.’ 는 말처럼, 현실을 통하여 모두가 같이 잘 사는 영적인 초월성을 추구할 때 우리의 삶은 건강해진다고 봅니다. 여기에 심리학자 매슬로우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그는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의 욕구단계가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맨 먼저 생리적 욕구→안전 욕구→애정,소속 욕구→존중욕구→자아실현 욕구. 하지만 여태껏 자기가 세운 욕구의 이론단계의 문제점을 말년에서야 깨닫습니다. 생각보다 ‘자아 실현의 초월 욕구’ 가 훨씬 더 높은 단계였다는 것을요. 여러분은 어디까지 다다르길 원하십니까? 우리도 뭔가가 실현되길 원하잖습니까? 그러면 이런 모습을 신앙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세례를 받은 분들이십니다. 하지만 나의 신앙은 왜 여전히 흔들리듯 여겨질까요?어떤 때는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요. 이미 성당에 나오는 것조차 귀찮게 여깁니다. 이미 이 미사 중에도 분심이 가득합니다. 솔직히 지금 세상은 신을 찾지도 않고요. 잘 믿지도 않고요. 오히려 신을 찾는 인간을 비웃는 세상입니다. 여기서 잘 들여다 볼 사항은, 단순히 신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특정한 형태의 유신론 관념을 부정한다는 얘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교회가 말하는 교리나 가르침, 실천해야 할 삶의 방식 등에 대한 것을 부정하고 싶어합니다. 왜냐고요? 먼 미래의 일보다 당장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행복을 원하니까요. 마치 앞서 직장인들의 예처럼, ‘승진하고, 진급하고.’ 에 대한 관심보다 지금 주어지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다볼산에서 예수님이 거룩하게 변모한 복음을 압니다. 거기서 빛나게 변모하신 주님을 보며 제자인 베드로가 무어라 말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초막 셋을 지어”.. 그냥 여기서 살자고 말하지요. 즉 현실에서의 안주(安住)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여기에 긍정하지 않으시죠. 오히려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데요.
오늘 말씀도 이와 비슷합니다. 독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들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솔직히 마음 한켠에는 ‘불쌍한 인간이 되어도 좋다’ 고 여길 분도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현실만을 바라볼 때, 복음에 나오는 “행복하여라” 라는 말씀은 전혀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현실을 통하여 이뤄지긴 하지만, 현실에서 안주하면서 만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상도동 본당 교우 여러분
안타깝게도 여러분이 만나는 직장의 세계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요, 물고 물어뜯는 현장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고요. 편안한 곳을 원하고요. 하고 싶은 것만을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기만 하다면 진정한 행복을 만나기보다 오히려 쪼그라든 건포도처럼 달긴 하겠지만, 볼 품도 없고 남에게 생명력을 나눠줄 수 없는 모습이 되고 마는데요. 살면서 신앙의 위기는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이 점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내 신앙이 바라는 개인적인 중심이,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실제 중심과 얼마나 벗어나 있는 지를요.’ 중심에서 벗어나 부차적인 것에 붙잡고 있을 때, 신앙의 흔들림은 배가가 될 것입니다.예를 들자면 가족, 진급, 욕망 등이죠. 그것을 넘어서야 참 행복이 보일 것입니다. 그런 자아실현을 해 나간다면 그 초월적인 자아 실현을 통해 결국 내가 살고, 모두를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이 바라는 행복까지입니까? 주님과 함께라면 그 이상을 만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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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물을 마시고 싶다면 컵이 필요하지요. 물론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먹을 수도 있지만 줄줄 흐르지요...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냐하면..소중한 것을 담으려면 틀이나 형식.시스템이 필요하지요..미사. 전례 등이 어색하게 보일 수 있고 공감이 안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의무" 가 사랑으로 넘어가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아직은 이것보다 거룩하게 해주는 게 없지요. 허나 많은 분들이 의무에만 치중하다보니 마냥 의무방어전이 되고 사랑으로 넘어가지 못하는데요.기쁨과 확신을 얻기위해 이 과정을 잘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