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5주간 토요일. 창세 3,9-24; 마르 8,1-10
누군가 질문을 합니다. “신부님~ 왜 주님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죄 많은 사람과 더 가까우셨나요?” 정말 그렇지요? 예전 안소니 드멜로 신부님의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을 줄로 매어 붙잡고 계신다. 그런데 네가 죄를 지을 때마다, 죄로 인해 하느님과 맺었던 그 줄을 자른다. 그러면 하느님은 너와 관계를 맺으시고자 매듭을 묶어 다시 줄을 매신다. 이렇게 하여 너를 그분께 조금 더 가까이 잡아당기신다. 너는 거듭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줄을 자르게 되고, 매듭이 하나씩 늘 때마다 너와 하느님의 줄 간격은 점차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짓는 죄가 꼭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많은 분들이 고해소에 죄를 고백하십니다. 그러면서 불편한 마음도 들지요. ‘내가 왜 이럴까? 안 그러고 싶은데..’ 하지만 오히려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이른바 목욕탕에 가면 뭘 하지요? 그렇지요. 때를 밉니다. 그러면 뭐가 보입니까? 때라고요? 아니지요. 밀고 난 다음, 뽀얀 새살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린 뽀얗고, 맨질맨질해진 새살을 만지고 싶어 목욕탕에 가는 것 아닌가요? 부활 찬송가에도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해 구세주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죄가 얼마나 복된가? 라고 노래하는데요. 이제 이런 것을 알게 됩니다. 죄는 분명 안 좋게 보이고 꺼려지지만, 오히려 이것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니 오히려 얼마나 기쁜 일이냐? 라는 건데요.
오늘 독서의 내용은 분명 우울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죽음이 생겼고, 낙원에서도 쫓겨났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으로 끝났다면 참으로 불행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사람을 배불리 먹이시는 주님을 통해 우리는 알게 됩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에게 먹을 것 뿐 아니라, 더 큰 것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요. 비록 우리의 선조들이 죄를 지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후대의 우리들을 챙겨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통해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 부족함을 통하여 당신을 만나기도 합니다. 나쁜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뵈오며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도 당신의 스케일 넓은 사랑을 베풀어 봐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