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4주일. 예레 1,4-19; 1고린 12,31-13,13; 루카 4,21-30
우리는 안 보이는 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감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을 인식하고, 붙잡고, 그동안 배운 가르침을 소화하여, 각자 다른 다양한 삶에 이 신앙을 적용시켜가는 사람들입니다. 헌데 많은 분들이 신앙은 갖지만,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씀들을 하십니다. 어떤 분은 겸손이요, 어떤 분은 실로 그러하며, 어떤 분은 남에게 놀림받을까 두려워, 없는 믿음을, 있는 척 가장하기도 합니다. 하나의 믿음 안에서 여러 다양한 사태를 만나며, 한편으로는 ‘신앙이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 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원래 사람이 그렇지요? 자기 생각이 강하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 생각을 넘어야만, 받아들여만 ‘새로운 나’ 로 부활할 수 있는데요. 다른 한편으로 잘 믿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가 주는 힘’ 을 만나보지 못해서입니다. 그럼 진리가 주는 힘이란 무얼까요? 요한복음 8장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요.여러분은 참된 자유를 원하십니까?일단 저를 가지고 설명하겠습니다.
어릴 때 제 모습을 회상하면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자라면서 많이 혼나기도 하였지만, 제가 하고 싶은 데로 하도록 부모님은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러다 지금의 제가 만들어진 3곳의 장소가 있었는데요. 그곳은 군대, 직장, 신학교였습니다. 이곳들의 공통점은 규칙과 명령 속에서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군대에서는 행정병을 하면서, 불필요하게 보이지만 그렇게 해야만, 질서가 잡힌다는 것을 배웠고요. 직장에선 여러 제품이 만들어지기 위한 필요한 공정과정을 배웠고요. 신학교에서는 진리를 배우면서 “규칙에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이다”(qui regulae vivit, deo vivit) 라는 것을 배웁니다. 여기까지 들으신 분들 중에 ‘너무 빡빡하고 부자연스럽지 않느냐?’ 하고 반문하실 수 있기에 이런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살려면 숨을 쉬어야 하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와서 모든 세포에 산소를 주입하고, 다시금 내뿜기를 반복해야 살 수 있습니다. 헌데 공기가 보이지 않기에 불안하실텐데요. 하지만 살려면 싫어도 호흡을 해야 합니다. 헌데 그걸 역행하면 어찌되나요? 여러분은 너무나 당연한 것을 이행해야 살 수 있음을 아십니다. 그걸 거스르면 결국 죽음을 맛볼 뿐이지요. 감각적으로 전부 느껴지지 않더라도, 내가 아직은 이해할 수 없기에 반발할 수 있어도, 그렇게 해야 되는 것들이 오히려 우릴 살립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그러하질 못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선입견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설교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고향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시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다 좋질 않았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좀 격하게 표현하면, ‘옆집 살았던 코찔찔이가 쟤야?’ 이런 거죠. 그런 선입견을 갖고 있는데 들었던 말씀이 감동으로 전해지겠습니까?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신부님들의 인사이동을 다른 지역으로 가는 이유도 그것이지요. 동네에서 자란 아이가 커서 사목자가 되었는데, 같은 동네사람들이 보기에 무슨 존경심이 있겠습니까?결국 사목자인 신부님들을 위해, 그리고 믿는 여러분들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가시는 것이나은 것이지요. 우리들의 본성이 그러하니까요.
예수님 시대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믿지 않습니다. 그것이 안타까우신 주님은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예로 드십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 이야기들은 결국 믿음이 자신을 살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야는 길을 지나가다가 과부를 만납니다. 그녀는 먹을 것이 없기에,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줌을 먹고 죽으려고 합니다. 여기에 엘리야는 기막힌 제안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엘리야 자기 먹을 것부터 내오랍니다. 여러분이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시리아 장군 나아만은 나병환자였습니다. 이를 고치고자 엘리사 예언자에게 갑니다. 몸이라도 좀 관심있게 봐주고 만지면서 고쳐주려니 싶었지만, 엘리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이에 그는 화를 냅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강이 없어서 여기 온 줄 아나?’ 싶은거죠. 하지만 결국 사렙타의 과부나 나아만은 일단 시킨 데로 하면서 원하는 것을 얻는데요.
사랑하는 상도동 본당 교우 여러분.
우리의 모든 행위의 저변에는 사랑이 깔려있습니다. 그 원칙이나 규칙이 당장에는 이해되지 않더라도, 먼저 믿고 따른 다음 결론을 만나신다면, 과연 그 결정이 후에 와서도 옳았던 것인지, 아니면 섣부른 것이었는지 알 수 있을텐데요. 우리가 가진 선입견을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