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5주간 수요일
진정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때란 언제일까요? 기도하면서 보이긴 합니다만, 인간적인 시각으로만 보자면 아무래도 어릴 땐 인지능력이 발달치 않아 잘 모르구요. 청소년 청년기도 아닙니다. 한창 자기 힘을 키우며 뻗어가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중년기와 장년기도 아닙니다. 체력은 젊을 때보다 약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정신세계는 살아있지요. 못 다 이룬 산 정상을 찍고자 막바지 힘을 짜냅니다. 그 이후 은퇴가 오고 점차 수그러지는 체력과 오락가락하는 정신줄을 보면서 슬슬 인정하곤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진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받아들이는데요. 물론 그 반대로 일이 없어지고 자리가 사라지니 그때부터 팍삭 늙어버리는 사람도 있는데요.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만나고픈 신앙이 지금 어디인가?를 여쭤보려고 그랬는데요. 독서에는 무고한 3명의 젊은이를 불가마에 던진 네브카드네자르 임금이나, 복음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이후에도 종 노릇을 한 적이 없다.” 고 외친 유대인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다들 자기가 생각하고 경험한 폭에 갇혀 사는 걸 봅니다. 그것이 자신이 보기엔 너무 당연하고요. 그 생각이 안전하며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여기지요.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 생각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거기서 더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라(요한 5,4)” 라는 말을 들어도 자기를 과신하는 이는 더 많은 고기를 얻지 못하는데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우리를 넘어서야 하는데요. “청하여라, 주실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라는 말씀처럼 당신의 말씀에 대해 탐색전을 펼치고, 감지해내고, 가끔 의심도 하면서 계속 들여다볼 때, 그동안 우리가 내 방식대로 믿으면서 하느님을 내 생각의 틀에 가두어 놓았음을, 당신을 그저 좁게만 바라봤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예수님 말씀처럼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 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걸 실천한다.” 즉 예수님은 기도 중에서 하느님을 보고 움직였고요. 유대인은 고답적인 그들의 가르침만을 붙잡고 갔는데요.
우린 1독서의 내용처럼 ‘당신의 종’을 구하신 하느님을 체험할 때, 우린 변화된 삶으로 옮겨갈 수 있는데요. 이젠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와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참된 것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