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4주간 수요일. 1고린 12,31-13,13; 루카 7,31-35
밤에 쳐다볼 수 있는 달은 여러 모양을 갖고 우리에게 비춰줍니다. 보름달, 상현달, 초승달, 하현달, 그믐달, 안 보이는 삭, 게다가 어중간한 모양도 있고요. 게다가 제일 큰 슈퍼문이란 것도 있습니다. 헌데 우리가 달을 쳐다볼 만한 여유가 없어서인지 평소에는 크게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는 것만 알고 넘어가거나, 모르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달에도 여러 모양이 있는데 하느님의 모습도 여러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오늘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들은 것도 많았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예전 본당 때 일입니다. 당시가 ‘신앙의 해’ 였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새로운 교회로 변화된 지 50년이 되던 해였기에 저도 평신도의 참여와 여러 문헌에 실린 헌장을 알리는 때였습니다. 그러던 때에 예비자를 담당하는 어떤 분이 항의합니다. ‘그런 것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하는 것이지, 왜 우리들보고 하라고 하십니까?’ 저는 답답했지만 알려드려야 했습니다. ‘교회가 변화된 지 5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형제님은 아직도 중세적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십니까? 세상은 변화에 따르는 게 맞다고 여기면서, 교회도 새로운 방식을 도입한 지, 반 백년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예전 것에 머물러 계십니까?’ 사람은 말입니다. 믿고 싶은 데로 믿고, 보고 싶은 데로 보는 구석이 있는데요. 과연 그런 부분적인 지식이 자기를 살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이 그런 것을 보여줬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무얼 해도 반대만 하고 외면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의 방식이 맘에 안 들었겠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하게 됐습니다. 하늘의 달이 변하는 것도, 계절의 변화도 그렇습니다. ‘왜 덥냐? 왜 춥냐?’ 불만이 생겨도 나중에 알지요. 그 순환의 변화가 서로를 살린다는 것을요. 적절하게 다가오는 변화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신앙이나 인생이나 도태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그 때에 맞게 무언가를 하셨습니다. 그것을 아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