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2018. 8. 28. 오후 5:21:53

글자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예레 1,17-19; 마르 6,17-29

  19세기 영국의 비평가 토머스 칼라일이 셰익스피어를 가리켜 인도를 다 준다 해도, 작가 셰익스피어와는 바꾸지 않겠다는 말을 했듯, 영국이 자랑하는 작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햄릿이 있습니다. 햄릿은 그 캐릭터가 참으로 우유부단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사가 있지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덴마크의 젊은 왕자는 인간이 겪는 고충 가운데 하나인 내적분열을 보여줍니다. 알고 있는 것을 선택하며 투쟁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흐름에 따를 것인가?’이건 우리가 겪는 문제와 다르지 않는데요.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죽음에 맞이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평소 헤로데에게 직언을 해왔던 요한이었지만 그를 눈엣가시로 여겨왔던 헤로데의 새로운 부인인 헤로디아가 그 죽음을 사주(使嗾)합니다. 헤로데, 헤로디아라고 법이나 관습을 몰랐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아는 의 성격을 보게 됩니다. 요사이 법은, 대단히 기술적이고 법률적인 의미만을 두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으로만 전락해가는 실정이고 새로운 법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둡니다만, 원래 법의 성격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라면 다 아는 자연법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마치 10계명처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도 통하고요. 보편적이라 어떤 사람이라도 인정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자연법에는 전제가 따르는데요. 여기에 참여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건 원래부터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알지만 지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 번째 경향, 아는데도 어기는 경우 가 헤로데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데요. 즉 거부할 자유가 있기에, 아무리 요한 같은 사람이 와서 얘기를 해도 거부하고, 못 알아듣는 척하고, 본인에게만 이로운 것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성은 더 선한 것을 찾을 때 성장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눈을 우리 자신이 가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알면서 행하면 더 죄가 크고요. 자연법을 어길수록 인간본성과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독서처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평소 옳은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야 당신의 뜻을 더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