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1고린 8,1-13; 루카 6,27-38
신학교에 있을 때는 공부를 많이 했다고 여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수업에, 레포트가 한 학기에만 23개까지 제출했던 때를 보노라면, 분명 많이 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신부가 되고나서 한 달만에 모든 생각을 뒤엎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신자들의 관심과 제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같은 하느님 아래서 같은 교리를 배웠다고 여겼지만, 저는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삶이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역설하면서 당신이 내신 교회의 가르침을 관리하고 지키려 하였지만, 교우들은 뭔가 다른 것들을 원했습니다. 세상의 어둠과 혼란이라는 비를 피하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그만큼 세상의 삶이 퍽퍽하고 힘드니까요. 실제적으로 서로의 입장이 다른 우린, 과연 무얼해야만 할까요?
성무일도의 독서기도를 보면 오늘 기념일을 맞이한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강론이 나옵니다. 하도 강론을 잘해서 ‘금구(金口), 황금의 입’ 이란 명칭까지 붙었다지만, 요사이 읽어보면 번역이 잘못되었는지, 잘 와닿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 4세기 중반과 다른 무언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세계사적으로 17세기까지 과학자를 비롯한 모든 학자들은 신학을 배우면서 ‘절대자를 믿는 감각’ 이 있었구요. 19세기까지 모든 학자는 철학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힘’ 을 키워왔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하느님을 찾기보다는 그저 배운 이론지식에 따른 자격론을 우선시하고요. 그 지식이란 것도 그다지 깊이가 없어, 이득을 채우는데 열중을 하다보니 이상한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강론을 한답시고, 기도를 하고 써내려가고 있지만, 가끔 이런 생각에 젖습니다. ‘과연 현세를 살고있는 교우들의 마음의 경종을 울리고,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려고 애쓰는 활력을 주는 강론이 되고 있는가?그리고 저 자신도 그리 살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오늘 말씀에 눈이 더 갑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우리가 배운 것이 현실로 이뤄지기 위해 무얼해야 할까요? 복음에서 말하는 ‘자비로운 사람’ 이란, 내가 무언가를 남에게 주되, 맺은 결과까지는 확인하지는 말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우리의 사랑이 늘 그래왔지요. ‘상대방이 내 말을 잘 따르고 있나?’ 를 확인하였기에 문제는 발생되었습니다. 그저 우린 실천할 뿐입니다. 요한 성인도 많은 강론을 했지만 그도 결실은 못 보았습니다. 그를 싫어한 이들에 의해 유배살이를 하다가 삶을 마쳤으니까요. 결국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맺는 결실은 우리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에게 허락되었기에 우린 그저 맡은 바를 해야겠습니다. 당장에는 그것이 실망처럼 보일 지라도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