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0주간 토요일. 1열왕 19,19-21; 마태 5,33-37
얼마 전 예비자 교리 때 일입니다. 묵상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고 30분을 실제로 같이 기도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 이후, 한 형제님께서 여러 질문을 하시더니, 끝내 반을 바꾸어 나가셨던 일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겠지만 예전 개신교를 다녔던 분이라 그랬는지 그분의 질문은 이러했습니다. ‘왜 기도를 내가 원하는 데로 하면 안되냐?’ 는 거였습니다. 솔직히 예비자에게 너무 어려운 기도를 알려주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내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먼저 부르시는 것을 알고 거기에 응하는 것을 알 때 이 신앙의 삶이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사실 우리는 ‘~하는’ 것에 익숙해 있습니다.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이 가치가 있고, 능동적으로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여깁니다. 사랑도, 용서도, 기도도..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더 노력해야 한다' 말들을 합니다.게다가 기도도 자기가 목표한 지점에 산 정상에 오르듯이 도달하려고 듭니다. 하지만 이 신앙의 삶은 자신의 능력으로 도달될 것이 아님을 알게됩니다. 이제민 신부님의 저서인 ‘제3의 영성’ 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제1의 인생이 능동의 영성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제2의 인생은 능동의 영성이 지닌 한계를 체험하는 기간이고, 제3의 인생은 수동의 영성에 바탕을 둔 인생이다’ 라고요. 뭔가 기다리고 수동적인 삶이 그저 무력한 실패자처럼 여겨지십니까?
오늘 엘리사는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나서 그동안 끌어왔던 소를 제물로 바치면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아예 맹세하지 마라” 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걸 알게됩니다. ‘내 인생의 각본에서 나는 참여할 뿐, 결과까지 장담할 수는 없다.’ 는 점입니다. 일단 앞일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불러주시면서 시작된 삶이 현재 어떻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여전히 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습니까? 아니면 좀 부드러워지셨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