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6주일. 생명주일. 사도 10,25-48; 요한1. 4,7-10; 요한 15,9-17
지금은 원주 교구장님이신 조규만 주교님께서 신부님들에게 피정강론을 할 때 일입니다. 피정의 본 내용을 꺼내시기에 앞서 이런 물음을 던지며 시작하셨습니다. “요사이는 애완동물을 많이 키웁니다. 이젠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예전보다 커져서 ‘애완동물’ 이라는 단어보다 ‘반려동물’ 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만큼 사람과 더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럼 그 사랑이 정말 커졌다면.. 키우고 있는 개, 고양이 대신하여 내가 죽을 마음이 있습니까?” 라고요. 그래서 저도 여러분께 질문 드려봅니다. ‘키우고 있는 반려동물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는 분.... 손 한 번 들어보십시오.’
제가 왜 이런 질문을 드렸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의 하느님은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사람이 되시고, 나중에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하고있는 사랑이란, ‘사람이나 동물이나,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랑에 만족하는 수준’ 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과연 그러한 마음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숭고하면서 감동어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부활 6주일이면서 생명 주일입니다. 일본에는 하이쿠라는 시가 있습니다. 모든 글자는 겨우 17글자로 쓰여지지만 온갖 계절이 다 살아있는 방랑시인의 시입니다. 그 중에 ‘본초’ 라는 시인의 시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땔감으로 쓰려고 잘라다 놓은 나무에 싹이 돋았다.” 이게 다입니다. 사람이 살려고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장작꺼리를 만듭니다. 하지만 사람이 자연을 위해 해주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갖다 쓰기만 할 뿐이지요. 그런 아픔을 겪고 있는 억울한 자연인데도, 아무 말 없이 자기 생명을 틔워냅니다.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생명의 기운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어쩌면 비슷해 보입니다. 내가 사랑을 시도하고, 내가 베푸는 것처럼 여길 수 있지만, 실은 그 사랑이라는 것을, 과연 누가 내게 부어주었기에 그것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답은 ‘나 자신은 아니다. 곰곰이 여겨보면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느님이 주셨음을 인정’ 할 수 밖에 없는데요. 보통 사람들은 ‘내 말 잘 들어주는 그 무엇’ 같은 사랑에 집착하지만 실은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을 만나고 체험해야만 우리도 그런 사랑을 베풀 수 있는데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런 사랑을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오늘 말씀들이 그러합니다. 복음에서 주님은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라며 사랑을 먼저 부어주셨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 라면서 당신의 복음이 이스라엘 사람 뿐 아니라 전 인류 모두에게 폭넓게 해당된다고 말하고 있고요. 2독서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라면서 먼저 주님께서 사랑을 가르쳐 주셨기에 우리도 남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알려주시는데요. 자..이제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배웠다면 어떤 차원의 사랑으로 넘어가야 하겠습니까? 내 말 잘 들어주는 것에만 머물렀다면 이제 어떤 사랑을 실천해가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상도동 본당 교우 여러분
사람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낳을 수 있고, 자녀를 기를 수 있고, 오지(奧地)같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곳을 찾아가 동식물도 돌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모상(模像)이라 일컫는다면, 이제 우린 폭넓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할 때입니다. 5월 모든 생명이 꽃피고 약동하는 때에 하느님의 사랑을 나의 자리에서 실천해봐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분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