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보스코 기념일
예전 신학생 때 일입니다. 우연찮케 지방 여러 곳에 살던 신학생끼리 프로그램을 하면서 복음 나눔을 하던 때였습니다. 그 중 1명이 참신한 나눔을 하기에 놀랍기도 하면서 대단하다고 여겼었습니다. 하지만 그 놀람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성경책은 해설이 있는 주해성경이었는데, 그가 전해준 내용이 고스란히 거기에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그 친구는 앵무새처럼 얘기했던 것인데요. 가끔 그 때 일을 떠올리곤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나눔은 늘 살아있고 생동감이 넘쳐야 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많은 이들이 성경을 공부로 여기는 경우가 많아서 같은 성경내용을 다시 만나게 되면 예전에 배운 내용을 떠올리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그 성경은 뻔한 내용이 되고 마는데요. 그래서 가끔 복사들하고 얘기하다보면 이런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들은 강론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단다.’ 라고 이야기 하면 복사들은 이렇게 대꾸합니다. ‘에이~ 예전에 써놓은 것 하시면 되잖아요?’ 그럼 차마 말로는 못하고 속으로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야.. 그러면 망하는 거야’
오늘은 요한 보스코 기념일입니다. 예전에는 돈(don) 보스코 라고 불렀습니다. 스페인어 ‘돈(don)’ 이란 단어가 ‘님’ 이라는 존칭의 표현이기 때문이지요. ‘보스코님’ 이라고요. 그는 청소년을 사랑하고 돌보면서 그들에게서 하느님의 속성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청소년을 통해 '유연한 태도' 를 봤을 것입니다. 마치 1독서에 나온 다윗처럼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하며 책임을 통감하고,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모습은 자기 안에 굳어있지 않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인데요. 이른바 ‘생각의 유연함’ 은 기도하는 이들이 가져야 할 덕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고향 나자렛에 왜 가셨겠습니까? 좋은 복음을 나눠주고 싶으셨겠지요.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신기해 할 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받아들이지 않기에 ‘기적의 힘’ 도 무용화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우리도 마찬가지라 여겨집니다. 많은 분들이 미사참례를 생동감 있게 바라보기보다는 ‘성당에 안 나가면 왠지 찜찜하다’ 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살아있는 생동감있는 자세가 아닌데요. 우리의 미사가 그런 정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알고파서 마치 타오르는 불처럼 살아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