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2주간 화요일. 지혜 2,23-3,9; 루카 17,7-10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만, 처음부터 사람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지는 않지요. 직함에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있으면, 일을 그르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도 스님이 되려면 ‘행자’ 라는 이들이 밥이나 청소를 하다가 나중에 ‘사미계’ 를 받으며 스님이 되듯이, 신부님이 되려는 신학생들도, 처음부터 ‘대접’ 받는데 익숙하면 문제가 생기는데요. 제가 있을 때만 해도 일주일에도 몇 번씩, 강의가 없는 시간에 불려나가, 여지없이 학교 청소와 나무를 옮겨심기도 하고, 수요일에는 따로 봉사활동을 나가서 아이들 공부방을 봐준다거나, 병원에서 허드렛 일을 하곤 했습니다. 어린 나이라 처음에는 불평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그런 노동의 시간이 사람을 키워줬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요.
오늘 말씀이 그러한 것을 보여줍니다. “돌아오는 그 종에게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마치 이 이야기가 사람을 종 부리듯 여겨져 불편할 수 있는데요. 그런데 요즘도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요사이 신학교도 국가에서 학교평가를 메기고 있어, 높은 수준을 요하기에 공부를 많이 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신학생이더라도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친구들이 들어옵니다. 그러기에 학생들의 사고방식이 예전과 다른데요. 그래서 가끔 학교가 필요에 의해, 청소나 작업을 시키니 이런 반응이 나오더랍니다. ‘이걸 우리가 왜 해야 해? 월급 받는 관리인들 있잖아? 내가 이거 하려고 왔어?..’ 물론 소수가 이런 반응이었지만, 한편으로 손에 때 안 묻히고, 남 보기에 그럴 듯한 것만 찾는, 요즘 세태의 단면일 것입니다. 과연 그럴 듯한 것이, 정말 그럴 듯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독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고생으로 여기지만, 오히려 의인들은 그 시간을 통해서 더 단련되며, 은총을 얻으며 사랑을 키워가고, 본인이 선택받았음을 아는데요. 스스로 낮아지는 겸손함이 필요할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