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6주간 월요일. 탈출기 14,5-18; 마태오 12,38-42
성당을 다니다 개신교회를 혹시라도 가게 되면 분위기가 되게 썰렁함을 느낍니다. 유서 깊은 성당에 가게 되면 각종 성화나 이콘, 스테인드 글라스, 그리고 조각품들이 있는데 반해 일반 개신교에 가게 되면 십자가만 덩그러니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린 신앙의 여정에 있어 이렇게 보이는 그 무언가가 많습니다. 교회 역사로 볼 때 신앙의 자유를 얻은 313년 이후 영세자들이 늘어나자 모든 이들에게 상징적인 표현만으로 신앙의 신비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보다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표현이 필요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모르던 문맹이었던 시절이었기에 이런 표현들은 보다 교육적인 도구로 강조됐던 것이 오늘날에 이르게 되는데요. 필요했던 성화상이지만 이것들에 우리가 얽매인다는 생각은 또 해보지 않으셨는지요..
오늘 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과연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충분이 이해가 갑니다. 보고 싶지요. 게다가 당신께서 오셨다 가신 지 이미 2천년이 지난 시간이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려 한다는 것, 이것이 나의 신앙을 가두는 틀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듣는 신앙입니다. 부르심을 받았던 성경의 인물이 이를 설명해줍니다. 그들은 들음을 통해 자신의 마음이 넓어짐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참 기쁨과 회개가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예전에는 문맹이었던 교우가 많았고 참 교화를 위해 성화상이 존재했지만 이제는 많은 나라에서 그 성화가 그저 예술품처럼 전락해가는 모습을 보며 조금은 씁쓸하다는 생각마저 드는데요.
그래서 오늘 알렐루야에서도 이렇게 노래했잖습니까?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라고요. 마음이 무디게 되면 1독서처럼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릴 그냥 놔두시오’ 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통해 그분은 다가오십니다. 내게 어떻게 다가오시는 지 알 수 있는 사람은 평소 깨어있는 사람만이 가능한데요. 오늘 그런 날 만들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당신의 뜻을 느껴보는 날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