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5주일. 이사 55,6-9; 필리 1,20-27; 마태 20,1-16
성경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좀 억울한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계실 때, 그분 옆에는 왼편과 오른편에 십자가형에 처한 사람도 매달려 있었습니다. 왼편에 있던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욕합니다. 그러자 오른편에 있던 사람이 따지듯 말하지요.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그러면서 주님께 말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이에 예수님이 답하십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순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그러면 그동안 할 것 못할 것 다하며 살다가, 죽기 전에만 회개하고 세례 받으면 되겠네?...’ 글쎄요. 그러면 될까요?. 우린 어릴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계산적인 삶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혜롭다고 여기고, 당연시 여기는데요.
예전 원주 교구장님이신 지학순 주교님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장일순 선생의 일화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장일순이 9살 무렵, 그 당시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기억한다며 털어놓습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무개가 돈을 꿔가고는 안 가져옵니다. 제가 가서 독촉할까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가지마라. 너도 자식을 키우잖니? 돈은 줬으면 그만이지 달라는 소리 하는 거 아니다. 갚을 마음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 갚을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달래면, 돈은 받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잃잖니? 또 갚을 마음은 있는데 돈이 없어 못 갚는 그 사람 마음은 얼마나 안타깝겠니? 그러니 그런 슬기롭지 못한 짓은 하지마라....’ 이런 대화를 듣고 자란 장일순은 나중에 커서 비슷한 상황을 만납니다. 알던 지인 중 한 명이, 자신의 돈을 꿔 간 후, 도무지 갚을 생각을 안하여 분개하던 중, 결국 법으로 처리할 수 밖에 없다고 여겨서 서류를 다 갖춰놓고 마지막으로 장일순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장일순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쭉 다 듣더니 결국 이런 말을 합니다. ‘너.. 그 돈 없으면 죽니?’... ‘그 돈 없어도 너는 살 수 있잖니? 네 말대로 하면 그 사람 죽는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너도 발 뻗고 못 잔다. 평생 그 원한 어떻게 받으려고 그러니? 그러니 포기해라..’ 물론 적지 않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포기하라는 말을 듣고도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자, 이제는 아예 쐐기를 박는 말을 합니다. ‘니가 그 돈 없어 밥 못 먹는다면 내가 쌀값을 마련해주마.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포기해라. 없는 돈이다 생각하고 편안하게 지내라. 그 사람이라고 속 편하겠냐?’ 이 말까지 듣자, 그 사람은 그 일과 관련된 서류 일체를 불태워버립니다. 그러자 그 돈에 대한 집착이 떨어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답니다. 나중에라도 갖다주면 고맙고, 안 가져오면 그만이라는 마음을 갖고서 말이지요.
제가 왜 길게 이런 얘기를 꺼냈을까요? 오늘 복음에 나왔던 당신의 구원방식이 계산적인 눈으로 보기에는 이해가 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에 일하러 나온 사람이나,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이나 똑같은 급여를 주고 있으니 순간 ‘이게 뭔가?’ 싶을 것입니다. 여기서 살펴볼 사항은 첫째로, 당신의 구원 방식과 둘째로, 지급받기로 되어있던 한 데나리온의 가치를 봐야겠습니다. 먼저 당신의 구원방식은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편가르는 방식의 사랑이 아닌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누가 귀하고, 누군 덜 귀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둘째로는 한 데나리온의 가치입니다. 성경상으로 보기에 그저 같은 일당 수준의 금액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실은 이거 하나면 다 되는 가치입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만족이란 것을 모릅니다. 욕심에 가득 차 ‘유독 나만 더’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다보니 무슨 문제가 벌어집니까?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는 뜻이 뭔지를 모릅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이런 뜻이지요. ‘하루 먹을 만큼만의 양식’ 이지요. 하지만 여러분은 여기에 만족하십니까? 먹지도 못할 만큼의 양을 냉장고에 채워넣듯, 그렇게 살고들 있잖습니까?. 게다가 이런 현상은 저보다 젊은 친구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그들의 계산적인 모습을 보며 이런 탄식을 합니다. ‘저것이 전부가 아닌데 왜 저것만 가지려고 하지?..’ 하고요.
1독서에 나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당신의 생각을 배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계산' 이라는 판의 위에서 바라봐야만 진정 참된 것이 보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