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0주일 미사
찬미 예수님~ 요사이 정세와 여러 사태를 보면서 어떤 판단이 드십니까? 저는 독서와 복음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신앙이 결국 어디로 가야할까? 에 대한 방향이 봅니다. 그러면서 이런 결론을 다다릅니다. 그것은 ‘현재의 시대가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완전히 나를 거기에 맡겨서는 안된다.’ 는 사실입니다. 무슨 부정적인 관점이냐? 하실지 모르지만 우린 역사를 통해 이런 것을 봅니다. 예전에는 그것이 옳았다고 여겼고, 맞는 결정이라 여겼지만, 몇십년이 지나보니, 오히려 잘못된 결정이었음을 발견합니다. 민주화로 가는 과정 중에서 벌어졌던 여러 사건들이 떠올려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교회는 좀 다릅니다. 성당 위에 걸린 예수님은 그 당시의 역사의 판단으로는 사형수로 판명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그 죽음을 기리며, ‘이렇게 살아야 한다’ 고 버젓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성인품, 복자품에 오르신 순교성인들이 그것을 가르쳐주시는데요. 이처럼 역사의 판단은 어제와 오늘이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보게 해주지만, 교회의 역사는 2천년간 같은 이야기를 하며 되새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1독서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공정함과 정의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이 말하는 정의는, 시대와 조류에 따라 다르게 평가받을 수도 있음을 보여줬습니다만, 그 분의 정의는 언제나 한결 같습니다. 1독서에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그 분이 말씀하신 정의가 드러나는 시간은 사람마다 달리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이 말하는 변할 수도 있는 정의의 개념과는 달라 보입니다. 오히려 당신이 말씀하신 사랑은, ‘세상이 말하는 정의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정의’ 가 될 때, 참다운 정의가 나옴을 말씀하시는데요. 그래서 2독서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이 배척을 받아 세상이 화해를 얻었다면, 그들이 받아들여질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배척을 받았던 이들이 다시 새롭게 태어난 성인, 복자들을 보며, 우린 무엇을 느껴야 하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지금 세상이 나에게 말하고 있는 판단의 말이 전부는 아니다.’ 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삶은 쉽지가 않습니다. 시복식이 있었던 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런 미사 강론을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
보통 사람들은 ‘세상의 요구에 순응해야 한다’ 고 말합니다. 신자인 우리 중에서도 그 말이 맞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1984년 103위 시성식과 시복식을 통해 우린 또 한번 깨닫게 됩니다. 신앙은, 세상이 말하는, 그때그때마다 다른 정의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음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개포동 본당 교우 여러분~
참된 사랑은 하느님의 뜻마저 돌려놓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여인은 신자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도와주려는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딸을 살리고자 한, 사랑의 마음이 이런 발언을 하게 만듭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자존심마저 내려놓는 사랑이, 하늘을 감동시키는 사랑으로 거듭났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랑을 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성인, 복자들 못지않는 인생이 펼쳐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