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9주간 금요일. 토빗 11,5-17;마르 12,35-37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사실 우린 ‘생긴 데로’ 사는 경우가 많아보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생긴 데로’ 는 단순히 외모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의 습관’ ‘무의식적인 생각과 행동’을 뜻합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할까요? 일단 예전부터 그래었구요. 그러면서 내가 편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도 발생합니다. ‘여기에 대해 무엇이 문제인가?’ 바라보지 않습니다. 편안함에 갇혀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이 고해성사를 하시면서도 아시잖습니까? 매번 같은 내용의 고해를 합니다. 울타리 안에 갇힌, 반복된 습관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안 해야지, 고쳐야지’ 라며 다짐을 해보지만 그것이 ‘변화’ 에 까지 이르지 않는 나름의 이유를 봐야 하는데요. 그 이유 중 하나가 ‘내 행동의 인습’ 이지요. 이전부터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다보니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못하고 있는데요.
얼마 전 성령강림대축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별로 감흥이 없다는 표정입니다. 왜일까요? 일단 이렇게 여쭤보지요. ‘하느님의 일과 개인적인 일이 부딪히는 경우, 무엇을 먼저 선택하십니까?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이 만날 경우 무엇부터 하십니까?’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이 밀리고 있습니까? 이것만 봐도 내가 이 신앙을 어떻게 믿고 있느냐? 가 드러나는데요. 그러다보니 교회를 이용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위해서, 교인들을 일부러 만나고, 접근하고, 뭔가를 꾸미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 경우가 있었기에 우린 우선순위를 다시 잡아야 하는데요.
오늘 복음에 그러시지요.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구약의 예언은 다윗왕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긴 했습니다. 물론 인간이 바라본 역사의 시간 구성에서는 옳게 보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8장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창조의 전 과정을 주관하신 하느님이 실제로 더 먼저였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먼저 택해야 할까요? 독서에 토빗은 눈이 뜨여져 기뻐합니다. 눈에 약을 발라서 나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으로 인해 새롭게 눈이 떠짐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세를 어찌 보고 계십니까?
다시 맨 처음 드린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성령’을 받고 그것으로 사는 우리라면, 내 생각에 갇혀 살면 안 됩니다. 소신과 아집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만, 그로인한 결론은 나중에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화답송 후렴에 이랬지요.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내 생활 중에서 주님을 얼마나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지 바라보신다면, 이런 찬양의 말은 자연스레 내 입에서 흘러나올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