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주일미사. 사도 2,42-47; 1베드로 1,3-9; 요한 20,19-31
여러분께 퀴즈 하나 내면서 시작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때와 부활하신다음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 나온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는 인사입니다. 예전에는 하지 않으신 것을 지금은 왜 하실까요?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사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는 인사는 유다인들이 평상시에 쓰던 인사법이었습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마음의 평화' 를 원하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평화는 그저 '안정제' 같은 평화가 아니라 고난과 수난을 이긴 후 맞이하는 평화가 될 때, 진짜 평화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인데요. 이렇듯 당신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제자들에게 죽음이라는 공포와 불안을 이겨낼 수 있다고 격려하는, 승리의 부활과 관련된 인사말이었습니다. 그것이 미사 중, 서로에게 인사하는 ‘평화의 인사’ 에서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는데요.
이런 인사를 매일, 매 주일마다 미사때마다 하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쩌면 세상에서 배운 학습방법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배운 것이란 이런 것이었지요. 모든 것을 오감으로 보고, 느끼고 만져봐야 알겠다는 방식입니다. 물론 직접보고 만져본 다음, 판단하면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 오감이란 자체를 내가 얼마만큼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 느낌의 미묘한 세밀함마저 내가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자면 어르신들이 간혹 ‘고기 맛이 변했어’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과연 고기 맛이 변했던 걸까요? 그건 아닙니다. 나의 상태가 예전과 달라진 것이지요. 마치 예전에는 별로였지만 요사이는 좋게 여겨지는 것들도 있는데요. 그렇다면 나의 감각이라는 것도 영원불멸하게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것뿐만 아니지요. 여전히 과학으로는 다 설명 못할 일, 의학적으로 분석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여기서 복음에 주인공인 토마스 사도를 만납니다. 많은 이들이 불신앙을 가진 제자, 불신앙의 아이콘이라고 손가락질을 합니다만, 우리도 사실 그렇습니다. 보고서야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만져봐야 알겠다는 모습은, 믿음의 차원이 아닌, 감각의 차원에서만 머물겠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현재 내 자신의 믿음의 정도가 이 정도 수준이다.’ 는 증거물처럼요.
그러면 우리의 신앙이 어디로 흘러야 할까요? 그저 내 소원 이뤄주는 신앙의 차원이 아닌, 부활신앙으로 가야 하겠습니다. 그럼 부활신앙은 무엇입니까? 1독서에 나옵니다. “형제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신자들은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우리가 없어서 어려운 것이 아니지요. 나눔이 없으면 어려운 이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활 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주일’ 로 지정한 이유도 그것입니다. 자기 것만 붙잡지 않고 있을 때, 비로소 기적이 어떤 것인지를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2독서에도 나오지요.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는 당신이 말씀하신 “성령을 받아라.” 는 말씀을 통하여 영적인 존재로 거듭날 때, 비로소 나의 삶이 어디로 흘러가야 할 지 배울 수 있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는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는 말씀처럼, 어려운 이웃을 꼭 눈으로 보지 않아도, 이미 우리 곁에는 그런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향하여 마음을 기울이고 실천을 통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답에 접근할 수 있는데요.
사랑하는 개포동 본당 교우 여러분
우린 다행스럽게 당신을 보고서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나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수준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신앙의 차원으로 넘어갈 때, 우리가 가려는 종착지가 어디일 지 보일 것입니다. 이제 당신의 부활로 모든 것이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정답은 이미 나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린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 있습니다. 아직도 판단을 유보하고 있고, 미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고 더 나은 선택과 결단을 통하여 당신께서 이미 가르쳐주신 모두를 위한 올바른 길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나도 살고, 우리도 제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