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9주간 수요일.

2017. 6. 6. 오후 5: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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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9주간 수요일. 토빗 3,1-17; 마르 12,18-27

  가끔 영화나 소설을 보면, 죽은 영혼들이 산 사람 곁을 떠돌아 다니면서 살아있는 사람을 해코지 하거나, 또는 대놓고 부러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죽었기에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더 느끼고 싶어 하던데요. 하지만 살아있는 우리라고 해서 꼭 즐겁지만도 않아 보입니다. 독서에서 토빗은 살아서 많은 곤궁을 겪고 모욕의 말을 듣는 것보다,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낫습니다.” 하고 있고요. 라구엘의 딸 사라도 위층 방으로 올라가 목을 매려고 합니다. 요사이 우리도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취직 못한 이들은 못한 데로, 직장이 있는 이들은 있는 그 나름대로, 죄어오는 현실의 중압감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데요. 이런 현실이 뭐가 행복하다는 것일까요?

  스님들만의 시를 모은 책을 읽는데요. 때는 고려시대입니다.

아침이면 함께 죽을 마시고

죽을 먹고는 그릇을 물에 씻는다

참선하는 승려들에게 다시 묻는다

여태껏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는가?

  그저 시 내용의 전부가 밥 먹고, 밥그릇 씻는 이야기가 전부인데 왜 못 깨닫느냐?’ 가 무슨 소리냐? 하실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런 이야기지요. 일상사 그 자체가 깨달음인데, 그것도 모르고 어디서 헤매고 있느냐? 란 말인데요.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이성과 감각이 살아있고, 느낄 수 있는 우리는 기도와 각자의 삶을 통해 매일매일을 맛봅니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지언정, 거기서 느끼는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의미와 신비와 감사함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실속 에서 빚어집니다. 소리 없는 침묵 속에서, 번잡한 사람 가운데에서, 할 일이 쌓여있는 내 앞에서요. 살아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오늘도 무언가를 제시하십니다. 그 분의 제안에 대해 스스로 안테나를 잘 세우고 더 잘 들여다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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