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오늘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우리는 모두 살고 싶어서 여기 모여 있습니다. 제대로 살고 싶어서 미사를 통해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좋은 선택을 해야겠지요. 헌데 실제로 꼭 바람직한 선택을 하지는 않습니다. 악을 통해 들어온 죄는, 한편으로 내가 자유롭게 의식적으로 선택한 행동이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길 원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해야 한다고 여겼고, 뒷담화를 해야 한다고 여겼고, 뭔가를 방해했고, 강요를 했습니다. 그래야 내가 산다고 여겼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것이 꼭 나 개인의 행동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퍼져나갑니다. 이른바 전염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이가 상처를 입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가난도 그렇습니다.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지요. 정치, 경제, 사회의 여러 구조적 문제가 퍼져 참혹한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이미 모두 알고있는 현상들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영양실조가 걸린 어린이’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힘들어 하는 청년들’ ‘터무니없는 적은 임금을 받고 있는 근로자들’.. 이것에 관해 별다른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넋놓고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독서가 더 와닿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다 아는 것인데 왜 못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십계명은 사랑에 관한 계명입니다. 이에 대해 슈바이처 박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십계명을 이행하기 위하여 세상에 3천만 개의 이상의 법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저를 놀랍게 만듭니다.’ 간단한 것을 알기 위해 뭐 이리 복잡한 것이 많이 필요할까요?
우리의 욕심으로 인해 생긴 나약함과 허물이 한편 나 자신을 실망시키고 무너지게도 만들지만 여기서 우리가 어디를 보며 가야 할 지를 알려줍니다. 단식이란 단순히 ‘밥굶기’ 가 아니라 내가 진정 무엇을 움켜쥐어야 할지 알려줍니다. 사순기간동안 본인 자신을 잘 응시하며 좋은 선택을 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