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6주간 토요일
가끔 교우분들과 면담을 하다보면 이런 말씀들을 하십니다. ‘제가 믿음이 부족해서요’ ‘확신이 서질 않아요’ ‘신앙심이 더 커지길 바랍니다’ 등등이지요. 믿음이란 것이 마치 건강검진처럼 키, 몸무게, 혈압처럼 ‘수치로 딱 계측이 나오면 편할텐데’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직도 그런 것이 없지요. 한편으론 ‘없는 것이 다행이다’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그런 검사지가 있다한들, 나온 결과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고요. 일단 우리 마음 상태가 기계처럼 일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주가 등락폭처럼, 계속 변하고 있으니까요.
오늘 독서에도 나왔지만, 이번 주 독서는 창세기 초반의 나온 주요 인물과 사건이 나왔습니다. 카인과 아벨, 노아, 그리고 바벨탑을 세운 이들까지도요. 여기서 본받아야 할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들의 차이가 보이십니까? 본받아야 할 인물들은 일단 온전한 마음을 드리며 하느님께 순명하는 자세로 따랐고요. 카인과 바벨탑을 세운 이들은 일단 ‘나 자신’을 더 드높였습니다. 물론 우린 이기적인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행동을 할 때 ‘난 잘하고 있다’ 며 합리화를 세우고 명분을 찾고요. ‘모든 사람을 위한다’ 면서, 실제로는 그 밑에 나의 어떤 욕구가 숨어있기도 합니다. 사실 욕구나 욕망을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자체로는 중립적인 모습을 띱니다. 하지만 문제의 차이는 여기서 발생되지요. 나의 욕구를 펼치면서 ‘이것의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할 때입니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뒷맛이 있는데요. 그 뒷맛이 ‘내가 이것을 원하는 진짜 이유’ 를 드러내줍니다. 그래야 ‘내가 왜 믿어야 하는가?’ 라는 숨겨진 욕구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주님께서도 참되게 바라실까? 나에게 좋다고 모두에게 좋은 것은 아니듯, 주님께서 보시기에도 합당한가?’ 라는 물음에 스스로 응답하면서 그 대답이 잘못 되어간다고 여겨진다면, 건강한 방향으로 방향전환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갈 때, 단지 믿음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죄스럽게만 살지 않을 수 있고요. 더 큰 확신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라는 직접적이고도 현실적인 방법도 나올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주님을 통한다면 ‘어떤 이보다 새하얗게 빛날 수 있음’ 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이 예고편과 가끔씩 맞이했던 체험이 우릴 살려줄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욕구의 허와 실을 만나면서,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하고 동감하게 되고요. 그러면 자연스레 믿음이 굳건해져 있을 것이고, 계속 그 마음을 유지하고픈 건전한 욕구가 나올 것입니다. 그리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