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2주간 금요일. 이사야 48,17-19; 마태 11,16-19
저 같은 신부님들이야 여러 본당을 두루 다니며 사목을 한다지만 정작 교우분들은 이런 사정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 신부님은 너무 독특해~’ 라면서 예전과 달라진 상황 때문에 난감하시는 경우를 보는데요. 당연히 저도 교우분들의 감정의 흐름을 자연스레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너무 빨리 자신을 개방하면서 신부님께 다가가면 상처 입을까 두려워, 감히 접근조차 안 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요. 다가오시더라도 1년 정도 지켜본 후 신중하게 말 건네는 분도 계시던데요. 저도 어릴 때부터 여러 신부님들의 모습을 보아왔고, 신부가 되어서는 함께 살면서 그분들을 다시 보게 됩니다. 재미있게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스타일이 비슷하게 흐르기도 하시고요. 어떤 분은 개성이 있고 독특하여,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단순하게 바라보면 그게 맞는 말씀이고 더 나은 결정일 때가 있던데요.
오늘 복음에 보면 그런 현장이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보고는 너무 절제한다고 여겨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요. 예수님은 사람들과 어울리니 이제는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키포인트가 되는 말씀이 마지막에 나오지요.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결국 이런 뜻이지요. ‘선뜻 이런 것들이 처음에는 본인의 스타일과 맞지 않는 듯 여겨지더라도, 표현된 방식이 내가 듣고 보았던 방식과 다르더라도, 그것의 의도는 결국 나중에 드러나기에 처음에 맛본 것이 전부라고 여기지 말라’ 는 뜻입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 세상에 드러낸 방식은 이러했지요. 구유에 갓난아기로 태어난 방식이었지요. 물론 구약성경에도 예언이 되어 있었지만 이게 어디 보통 사람들이 원한 방식이었습니까?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구원방식이 어디 보통 사람들이 바랐던 방식입니까? 하지만 나중에 고개가 끄덕여졌지요. 물론 여전히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랬기에 독서에도 나오지요.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하느님의 구원방식은 선뜻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을 통해 참된 구세주는 어떤 분인가? 를 알아듣게 해주는 길이 열리기도 하는데요. 당신이 바라신 방법을 다시 봐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