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3주간 토요일
교회의 역사가 오래되면서 교우분들이나 비신자 사이에서 빚어지는 오해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고 여기기에 무조건 조용해야 하고 편안해야 하며,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줘야 하고 문제가 발생되었을 때는 즉각 시정해줘야 한다’ 고요. 하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교회란 곳은 그다지 조용한 곳도 아니고요. 교우들의 원함을 다 들어주지 못할 때도 있어서 실망을 하곤하는데요. 그래서 요사이는 이런 일도 빚어집니다.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 하느님의 말씀은 따르겠지만 교회의 가르침은 교도권에 대해서는 별로 달갑지 않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기에 이 둘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데요.
오늘 독서인 묵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 이라는 이들은 자칫 두렵고 꺼려지는 인물들입니다. “입에서 불이 나와 원수를 삼키고 원할 때마다 재앙으로 땅을 치는 권한” 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들을 꺾으려고 지하에서 올라온 짐승이 두 증인을 죽여서 모든 사건이 종결된 듯 보입니다. 땅의 주민들이 그들 때문에 힘겨웠던 것이 끝나서 기뻐하니까요. 하지만 곧 하느님에게서 숨이 나와 이들을 하늘로 부르시는데요. 즉 땅의 주민들은 그 두 증인을 원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일을 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좀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원치 않았는데 오히려 하느님은 이들을 도와주시고 챙겨주셨다’ 는 사실입니다. 복음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현실에서 “7명의 형제들과 살았던 이 여자는 과연 누구의 부인인가?” 라는 질문에 오히려 예수님은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는 말씀을 하시는데요.
이제 정리 좀 하겠습니다. 우린 기억합니다. 예전 어릴 때는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모를 일이었는데 ‘좀 지나보니 알겠더라’ 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 당시 좁게만 보면 이해하기 어렵고 용서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후(後)에야 깨닫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구세주 예수님은 가난하게 태어나면 안되고 비참하게 십자가의 사형수로 죽으면 안된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우리의 기대치를 꺾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일부러라도 그러셨기에 구세주는 모든 사람의 구원자요, 더 가난한 사람들의 위로자이며 부활을 통해 현세에서만 모든 것을 걸지 않는 삶을 알게되는 지평을 열어주셨는데요. 저도 하느님의 생각은 다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린 그 너머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기다리며 남은 시간을 잘 살펴나가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