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3주간 월요일. 묵시 1,1-4.5.;2,1-5; 루카 18,35-43
내가 그나마 버틸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게 무얼까요? 잘나고 못난 사람과 섞여 있으면서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런 말을 읖조리지요. ‘니가 아무리 그래도 너보단 낫다’ 라는 마음 아닐까요? 위축될 수 있고 우울할 수 있는 지경일 때 어쩌면 이런 탄식이 우릴 버티게 해줄 지 모르는데요. 하지만 하느님을 따른다는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진정한 자세가 필요하다면 무엇을 바라봐야 할까요? 그건 바로 ‘현실 감각’을 익히는 일일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눈먼 이는 예수님께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과연 안 보이기에 단순히 답답해서였을까요? 어쩌면 불편하지만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면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부르짖었던 것은 ‘더 나은 삶’을 갈구하고 있어서겠지요. 이것은 회복을 간절히 원한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기에 독서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신부 생활을 하다보니 이 세계에도 가져왔던 소명의식이 변질되는 것을 보곤 합니다. 저희도 그럴진대 세상 속에서 사는 여러분은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심리학 이론 중에 ‘조해리의 창(Johari’s window)’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조셉 러프트(Joseph Luft)와 해리 잉햄(Harry Ingham)이라는 두 심리학자가 1955년에 한 논문에서 개발하여 조해리(Johari)라는 두 사람 이름의 앞부분을 합성해 만든 용어인데요. 여기에 따르면 인간의 자아는 4영역으로 구분된답니다. ① 나도 알고 남도 아는 나 ② 나는 알지만 남은 모르는 나 ③ 나는 모르지만 남은 아는 나 ④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나. 이렇게 하여 인간은 기껏해야 자신의 절반 정도만 안다는데요. 하지만 다 아는 것처럼 여길 때 여기서부터 개인은 물론 공동체까지 망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오는데요.
자 그렇다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길은 무엇일까요? 오늘 알렐루야에 나옵니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 빛은 혼자만 받고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 마지막처럼 눈이 밝아진 그 사람을 보며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이 빛은 고맙게도 퍼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함께 하면서 얻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얻은 것을 더 많이 나누십시오. 그것이 서로를 살려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