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3주간 수요일. 1고린 7,25-31; 루카 6,20-26
많은 분들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 행복이 어떤 성격의 행복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기에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만약 행복이 ‘삶의 목표’라면 아직 목표에 다다르지 못했기에 불행함을 느낄 것이구요. 행복이 ‘삶의 과정’ 이라면 순간적으로 지나갈 것이기에, 만나더라도 사그라질까봐 불안할 지도 모릅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이라 일컬을 수 있는 ‘행복선언’을 말씀하고 계시지만 많은 이들이 이 메시지를 별로 와 닿지 않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음의 메시지가 단순하게 ‘죽고 난 다음에 받을 미래의 보상’ 이라고 여기기에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여기는 것일까요?
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떠나야 할 사람이 영원히 살 것처럼 달려들면 불행할 수 밖에 없겠지요. 물론 우린 현실을 살고 있고요,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합니다. 하지만 너무 현실에 딱 붙어살면, 그것만이 최선이라 여기는 착각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고 답을 찾지 못한 채 굳어버릴 수 있는데요. 그러기에 우린 잠시 떨어져 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칼의 노래’ 라는 작품을 지은 소설가 김훈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저자의 매력은 쓰는 문장이 군더더기 없는 단호함에 있는데요. 그럴 수 있었던 배경은 지금도 글을 쓸 때 컴퓨터가 아닌 연필로 원고지에다가 쓴답니다. 그러다 작품 하나 탈고를 하면 방에 지우개 때가 몇 삽이 나온다는데요. 계속 보면서 다듬어 간 것이지요. 마치 조각품처럼 말입니다. 저도 강론을 매일 쓸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일단 써놓고 6시간 정도 지났다가 다시 봅니다. 그러면 그 때 보이지 않았던 군더더기가 불필요함이 보입니다. 그러면서 다듬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원하는 행복도 그렇게 만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행복이란 ‘나중에 한꺼번에 몰려 오는 것’ 도 아니고요. ‘당장 다가온 것이 전부’ 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기에 행복이란 것이 마치 나중에 다가올 ‘미래의 보상’ 정도로만 여긴다면, 많은 이들은 지칠 것입니다. 현실의 고통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현실’ 에서만 찾는다면 그 행복도 설익은 행복일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우리는 현재를 살면서 미래를 기다립니다. 그러면서 이미 과거를 통해 만났던 행복도 있었습니다. 순간순간 속에서,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잘 찾아가는 신비를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