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0주일.

2016. 8. 13. 오후 1: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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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20주일.

  종교인은 과연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야 할까요? 내야 한다면 왜 내야 하고 말아야 한다면 왜 말아야 할까요? 우린 모두 세례를 받았기에 여기 있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데요. 사람이 어른이 되면서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정 짓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얘기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당신의 의견일 뿐이고.. 우리 전문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라고 응대하지요.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남들에게 소신어린 발언도 못하게 합니다. 왜냐고요? 전문가가 아니라서 무시도 당하니까요. 무시를 당하니까 더 입을 다물게 되지요. 이런 생각에 미치면서 예수님이 당시 사람들에 의해 받았을 법한 무시와 냉대가 느껴집니다. 율법학자가 아니기에, 바리사이가 아니기에, 사두가이들처럼 지체 높은 집안 출신이 아니기에 받았던 설움들 말이지요. 게다가 오늘 말씀은 상당히 불편합니다.

  마치 막장 드라마처럼 집안이 아수라장이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과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과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이 말만 놓고 보면 이게 무슨 평화의 하느님이냐?’ 고 따질만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 당신이 말씀하고 싶었던 의도를 알아야 하는데요. 우린 그 의도를 찾고자 하느님이 바라보신 사회의식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어떤 분은 이런 말을 합니다. 종교단체는 조용하게 기도나 하고 있을 일이지, 사회에 참여하면 안된다.’ 라고요. 저도 어릴 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알아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입을 열지 않고 있는 상태가 오히려 하느님께 반대되는 행동임을 알았는데요. 루카 복음 19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 나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구세주로 칭송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헌데 바리사이들은 그런 소리가 듣기 싫었습니다. 군중 속에 있던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돌들마저 소리 지를 정도의 목소리를 우리도 내야 하는데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나온 사목헌장에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가 실려 있습니다. 이미 50년 전에 결정 난 일인데도, 우리 한국교우들은 이를 모르기에 오해를 많이 하는 현실을 사는데요. 여기서는 중요한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 존엄성: 인간 공동체가 세상을 사는 이유와 그 관계를 다루고요. 긴급문제 : 혼인과 가정, 다양한 문화 속에서의 관계, 경제생활, 정치 생활, 전쟁과 평화 속에서 국가 간의 유대 문제가 실려 있습니다. 이렇게만 소개하면 현실성이 떨어집니다만, 실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노동자 문제에 관한 현실을 얘기하면서 당시 30년대 경제 공황을 겪고, 2차 세계대전 이후인지라 인류 전체에 focus를 맞추면서, 세상을 선,악의 2분법적인 구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지 않고 섬기며, 세상을 경멸하지 않고 좋게 여기며, 세상을 단죄하지 않고, 오히려 힘을 실어주는 구원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67항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회는 실제 환경에 따라 시민들이 충분한 노동의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노동의 보수는 각자의 임무와 생산성, 노동 조건과 공동선을 고려하여 본인과 그 가족의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할 수 있도록 제공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공동선을 바탕으로 인간다운 삶을 유지시켜 줄 때 노동자와 회사는 좋은 관계가 되겠지요. 물론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때 69항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적정한 이익을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나타나는 분쟁해결을 위한 다른 방법이 아무 효과가 없을 때에는, 파업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일종의 최후 수단인 파업은 언제나 자신의 요구를 제시하고 권리를 쟁취하는 평화로운 수단이 되어야 한다. 파업이 폭력을 수반하거나, 근로조건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목적, 공동선에 어긋나는 목적을 걸었다면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 남을 돕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난한 이들에게 쓰고 남은 것을 주지 말고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처음부터 그들을 위한 몫을 챙겨놔야 한다는 얘기인데요. 이 내용이 교우분들의 사회적 직위에 따라 달리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다룰 때는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색깔론에 사로잡히지 마라. 그동안 우리가 가진 틀(Tool)은 뉴스, 신문보도에서 나온 정치, 경제적 관점의 틀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틀은, 우리가 말하는 것의 수준과 차원을 넘어섭니다. 시작부터가 보편적인 시각입니다. 누구의 편도 갈라놓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시각에 갇히지 말고 하느님의 시각에서 봐야 합니다. 듣다보면 자신이 가져 온 시각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만들어진 상에서 멈추지 말고, 솔직한 자기 자신을 봐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이 말씀하신 것이 보입니다. 경직된 방식으로 보지 말라. 우린 다차원적인 시각에서 수용과 정리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색깔론에 잡히지 않으면서 경지되지 않는 사고가 이뤄질 때, 당신이 말씀하시는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의 의도가 보일 것입니다. 우리는 편안하기만 하고 안주하기만 하면 안됩니다. 그건 우리를 오히려 굳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각과 태도를 제대로 정립해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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