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7주간 토요일
아직 버젓하게 살아있어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이미 죽어없어져 버린 사람이 있고요. 이미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 숨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린 어떤 사람이 되고픈가요? 나이가 여러분처럼 중년을 너머 노년으로 가는 이 시점에서 꿈, 희망 이런 것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저 현실에 적응해가며 사는 것이 더 시급한 때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생(生)의 종착역에는 다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아직 끝났다고 할 수 없기에 나머지 남은 ‘처신 문제’ 가 남아있는데요.
오늘 말씀에서 예레미아와 세례자 요한을 처리하는 문제에 사람들은 맞닿게 됩니다. 독서에서는 대신과 백성, 사제, 예언자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사형당할 죄목이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주 우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였습니다.” 라며 그의 옳음을 긍정하였지만 복음에서 헤로데는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주라” 고 명령합니다. 남의 눈이 더 무서웠던 셈이지요. 이런 일은 그저 성경 속에서만 벌어지지 않습니다. 뉴스나 신문 보도, 우리 교회 안에서도 벌어집니다. 비리, 부조리 때문에 냄새가 진동합니다. 하지만 이런 속에서 우린 무엇을 봐야 할까요? 실망을 해야 할까요? 그런 냄새나는 사람들 덕분에 올바른 의인이 더 빛날 수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세상의 힘과 세력으로 이미 그들은 죽어 사그러졌지만 오히려 사람들의 기억속에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으니 말입니다. 그러기에 알렐루야에서도 이런 노래가 나왔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우리 각자 각자가 한 명 한 명이 빛을 낼 때, 어두움에 유혹에 빠져드는 사람을 구할 수 있고 우리 쪽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했습니까? 의인 10명이 없어서 그랬다잖습니까?
우린 하느님을 믿으면서 이미 ‘남의 눈이 무섭지 않고,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시각대로 살기로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 맹세와 다짐이 우리를 용기있게 일으켜 줄 것입니다. 더 올바른 삶을 추구해가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