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8주간 수요일
오늘 복음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가나안 부인의 애절한 매달림, 간절함에 주목하게 됩니다. 물론 대단한 모습입니다. 그녀에게 신앙이 있는지, 믿음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 하나는 칭찬할 만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냉대의 반응에 서운해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잘 들여다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지, 당신의 사랑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말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참 바빴습니다. ‘구원’의 대상자는 일단은 지역상 이스라엘 사람이어야 했고요. 시간은 3년정도 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우선순위’를 따지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갑자기 일이 틀어지거나 취소되면 우리도 아쉽거나 한숨을 내쉬었을텐데 당신의 하시는 일은 매번 사람이 들이닥치니 힘드셨을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가나안 여인의 등장은 썩 반갑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집안” “강아지”를 운운하시지요. 그러나 결국 그녀의 원(願)을 풀어주는 당신의 모습은 참 감격스럽습니다. 당신 스스로 세우신 원칙을 극복하며 넘어서는 모습이 나오시니까요.
음악에도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너무 협화음같은 정격적인 음악만 연주하면 일단은 편안하지만 나중에는 쉬이 질리게 됩니다. 그래서 가끔 파격적인 불협화음이 섞인 코드나 전조(轉調-조바꿈) 진행을 통해 멜로디가 연결되면서 자연스러운 흐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원래는 이스라엘 사람의 구원이 먼저였지만 실은 당신의 계획에는 인류 모두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중동과는 거리가 먼 우리나라 사람도 주님을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 당시는 변칙이었겠지만, 오히려 모두를 살리는 사랑을 보이십니다.
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가끔은 내가 받은 사랑을 그 순간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서야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대다수가 그러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내가 아는 정도에서만 머물지 말고, 그 너머의 사랑을 기다리며 그것이 가능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