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2주일. 집회 3,17-29;히브 12,18-24;루카 14,1-14
예전 본당에 있을 때 가까이에 인근 지역에 은퇴 신부님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부활, 성탄 즈음에 정기적으로 찾아뵈었는데요. 간만에 여러 사람이 오니까, 반가우셨는지 말씀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대화의 주제가 ‘운동’ 에 이르자, 갑자기 당신께서 한숨을 푹~ 내쉬며 이렇게 말을 이어가셨습니다. “나도 예전에 테니스도 하고, 볼링도 하고, 축구도 하고, 여러 가지를 참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잘 하는 게 하나도 없었네..” 재미삼아 여러 가지를 해보았지만 지금에 와 보니 ‘어느 정도의 경지’ 에 다다르지 못했음을 한탄하시던데요. 제가 아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머리도 좋고 똑똑하고 의욕도 있기에, 그동안 건드렸던 취미도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사실 모든 것이 그렇듯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걸림돌에 봉착하면 바로 포기하고 다른 것으로 돌리던데요.
사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주님과 만나려는 여정의 길이 만만찮습니다. 그래서 2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만져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짙은 어둠과 폭풍이 일며 또 나팔이 울리고 말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닙니다. 그 말소리를 들은 이들은 더 이상 자기들에게 말씀이 내리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 말씀을 듣고 싶었을텐데 왜 “내리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을까요? 그건 말씀이 생각보다 달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실천하기가 만만찮습니다. 모두들 ‘경지’ 에 오르고 싶지만, 그 과정이 힘드니까 쉬운 길로만 가려하고, 피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기도나 성사생활보다는, 친목 모임이나 웃고 떠드는 곳을 찾아다니고, 그런 생활이 마치 신앙생활의 전부인 양 여기는 이들이 있는데요. 저도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한편 중도에 포기하거나 흥미만을 좇고, 자신이 바라는 바가 이뤄지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분을 만날 때마다 안타까움이 밀려듭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그런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 오히려 가난한 이들, 다리 저는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사랑을 하려면 어떤 사랑을 해야 하는가?’ 에 대한 말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내가 그래도 아는 사람, 할 수 있을 만큼만 하는 사랑, 베풀고 나서 나중에 나도 덕(德) 볼 수 있는 사랑’ 을 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질 않으셨습니다. 일단 예수님은 늘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셨습니다. 꼭 아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설교를 하실 때도, 번듯한 곳에서 하시지 않았습니다. 병을 고쳐주시거나 사람들을 먹일 때에도, 그들과 함께 하는 현장 속에서 기적을 이루십니다. 게다가 복음에 보면 ‘자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의 자리란 단순히 ‘의자’ 를 지칭하지 않습니다. 더 깊게 본다면, 자리란 혈연, 지연, 학연 등과 관련된 ‘연(緣)줄’ 입니다. 우리가 이야기 하는 ‘내가 아는 지인’, ‘누구누구의 라인’.. 이런 것은 다시 말해 ‘폐쇄성’ 을 뜻합니다. 누구와 친분이 있다는 말은, 뒤집어 보면 누구를 배제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듯 누군가를 배제할 때, 거기서 무슨 사랑이 나오겠습니까? 복음 마지막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이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아는 사람에게만 잘 해주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내게 해준 만큼 되돌려 받겠다는 의지 표명이 아니겠습니까? 이건 사랑이 아닌 계산인데요.
사랑하는 개포동 본당 교우 여러분
그동안 우린 어떤 사랑을 해왔습니까? 갚지도 못할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베풀었습니까? 자신을 낮추면서 무엇을 만나셨습니까? 사정 비슷한 사람끼리 베풀며 보답을 바라기보다는, 갚을 수 없는 어려운 이들을 위할 때에야 비로소 하늘의 보화를 쌓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겠고요. 그럴 때만이 나는 예전보다 하느님을 더 닮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그런 경지의 사랑이 되어가길 희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