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1주간 토요일

2016. 6. 17. 오후 10: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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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11주간 토요일. 역대하 24,17-25; 마태 6,24-34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따라야 하는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반대로 그분의 방식대로 하지 않는 이유를 바라본다면 오히려 설명이 쉬울 것 같은데요.

독서에도 나오듯이 하느님의 집을 버리고 다른 우상을 섬겼다 는 장면이나 복음에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걱정하는 장면은 분명 믿음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다는 꺼림칙한 면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유대인들이 원하던 구세주 상은 이랬습니다. 힘 있고, 경제력 있는 강한 왕이었습니다. 그 당시가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오셨다는 구세주는 약하디 약한 아기였습니다. 사실 이사야서를 비롯하여 여러 예언서에서는 이미 약한 아기로 태어나 사형을 당해 죽는 구세주 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보다 성경을 잘 알고 읽는다는 그들은, 그렇게 기록되고 예언된 구세주를 기다리기보다 자기들이 바라는 구세주 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혹시 우리도 이런 것은 아닐런지요. 세상은 내 맘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교회에서만이라도 내가 바라는 것이 이뤄지게 해달라.’ 고 말이지요. 예수님이나, 교회가 제시하고 가르친 것 이외에 또 다른 막연한 것이 있길 바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얼핏 보면 예수님의 구원방식은 무모해 보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현실과 와 닿지 않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하느님의 구원방식이 어떤 지 이 이야기로 오늘 강론을 마칠까 합니다. 예전 자전거를 한창 타고 다닐 무렵, 복장 제대로 갖춰 입은 자전거 동호회가 쏜살같이 한강 둔치를 치고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장비는 별 볼 일 없었기에 추월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후 그들을 만났는데요. 자전거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사람들은 풀밭으로 모여 뭔가를 뜯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쑥을 캐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심지 않은 것을 캐느라 정신이 없던데요. 하느님은 우리가 계획하지 않은 것들도 주시는데, 나는 왜 내 방식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요? ‘걱정이란 말은 다시 말해 여태껏 쥐고 있던 것을 놓치기 싫어한다는 두려움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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