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0주간 목요일. 1열왕 18,41-36; 마태 5,20-26
지금은 고인이 되신 화가 이중섭 씨의 작품이 요사이 전시되고 있다는데요. 몇 년 전 제주도에 갔을 때 그분의 이름이 걸린 미술관에 간 적 있습니다. 유명한 ‘소’ 그림보다 더 눈이 갔던 그림은 물감 살 돈이 없어 예전 담뱃갑 안에 담배를 싸던 은박지에다가 못으로 새겨 잉크를 넣어 그린 ‘은지화’ 라는 그림이었습니다. 사실 미술이란 장르가 돈이 많이 들지요. 재료값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 그림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수단이 거세 되어버렸을 때 나는 상황을 탓할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방도를 강구할 것인가? 어떻게든 표출하고자 했던 그의 방식을 보며 나를 가로막았던 것은 오히려 나 자신이었음을 보게 된다.’
오늘 말씀은 너무 내용이 명확하기 때문에 별 설명을 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한 사람을 용서하고,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는 데에 나를 막아선 그 무엇은,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말입니다. 내가 나의 걸림돌이요, 장애물이었던 셈인데요.
신부로 살면서 많은 장례미사를 거행합니다. 유가족들의 슬픔을 보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가집니다. ‘한 사람이 죽어야만, 없어져야만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단 말인가? 좀 더 일찍 할 수도 있었는데 왜 우린 주저할 수 밖에 없단 말인가?’ 라는 탄식입니다. 한 사람과 다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할까요? 얼마나 더 많이 기다려야 할까요?
기도를 하면서 알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총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나를 가로막지는 말자.’ 라구요. 당신께서 베푸시는 많은 것들 속에서 번뜩 드는 생각이 예전보다 더 낫고 옳다면 주저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