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5주간 목요일. 사도 15,7-21; 요한 15,9-11
가끔 휴가나 외국에 가게 되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합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이들이 얼굴과 말씨와 국적이 달라도, 한 믿음으로 미사를 봉헌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습니다. 예전 프랑스에서 보름 동안 25개국 신부님들이 모여 회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각 나라 신부님들이 돌아가면서 미사를 집전하는데, 그 날은 요사이 난민이 많이 생겨난 ‘시리아’ 라는 나라의 신부님이 미사 주례를 담당했습니다. 그분의 외모는 마치 이슬람 사람처럼 수염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성가를 부르며 시작을 하는데, 제가 느낀 첫 느낌은 마치 ‘이슬람 사원에 온 것 같다’ 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스페인에는 Flamenco 미사곡이 있고요. 우리도 국악미사곡이 있음을 기억해 냈는데요.
오 늘 말씀은 율법문제로 불거진 사안에 대해 대처를 해나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하느님이 주신 율법과 예수님의 구원방식에서 벌어지는 당연히 생길 수 있는 사항이고, 옛 것과 새 것의 충돌 속에서 빚어지는 정상적인 수순이라 보여집니다. 하지만 여기서 고집을 부리진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서로가 접근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한 믿음으로 뭉치려는 공동체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마태오 복음 23장 4절에 보면 바리사이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처럼 그들은 자기도 못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였지만 오늘 독서에는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명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최소한의 지침 속에서 일을 해결해 나가려고 합니다. 예전에 공부를 잘하는 비결이 적힌 책 내용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교리를 비교해 가면서 다른 교리를 밝히고 완성해 나갔듯이, 공부하는 이들은 대립을 강조하는 대신 조정해 나가야 한다.’ 라고요.
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들은, 달라도 무엇이 다르고, 같아도 무엇이 같아야 할까요? 그것을 헤아릴 때 참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