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5주간 목요일. 창세17,3-9; 요한 8,51-59
예전 신학생이 되려고 마음을 먹었던 제 나이 스물 다섯 무렵, 눈에 들어온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예전에도 읽었었고 들어왔던 내용이었건만, 와 닿지 않다가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 말씀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면 이제는 나 곽희태의 하느님이시기도 하겠구나’ 라고요. 나중에 그 묵상이 제대로 된 묵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뻤었는데요. 주님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초월함을 보여주고 계시지만 우린 그 사실을 잘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은데요.
오 늘 복음 말씀이 그렇습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당신이 바라볼 때 지금 살아있는 우리나, 이제는 세상을 등지고 사라진 사람들 모두, 당신의 시각으로는 다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부모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자녀를 떠올리는 부모님의 마음은, 여전히 그 아이가 살아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유다인들은 그 차원을 못 알아듣습니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라고 대꾸하면서 돌을 던지려고 하지요. 예수님이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라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니까요.
주님과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고 알아볼 수 있었던 까닭은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계약은 이것이다.” 하시면서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하십니다. 우린 세례를 통하여 새로운 이름,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이름이 새롭게 주어졌다는 것은 새로 태어난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그 세례명을 선택하기도 했지만 그 이름이 또한, 나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 만남은 하느님이 나를 찾으시기도 했고, 나 또한 하느님을 찾았기에 만날 수 있었다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이 만남은, 세례의 계약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기에 화답송에도 나오지요.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주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내가 주님을 찾음이 어떤 뜻인지 잘 헤아리셨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