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4주간 목요일. 탈출 32,7-14,요한 5,31-47
본당 소속으로 계신 우리 교우분들과 만남의 자리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단체는 다른 본당에는 없는 세부적인 부분도 신경 썼음을 보게 됩니다. 아무래도 ‘본당의 역사가 오래되었고 다른 지역보다는 인재도 있으시니까 그런가보다’ 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부분이 있는데요. 그건 단체는 다양하고 다채롭지만, 한 사안에 부딪히게 되면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하는 의구심입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바둑은, 한 번 내려놓은 돌은 물리거나 돌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한 수(手)를 두더라도 시간이 참 많이 소요됩니다. 그만큼 신중하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100년도 안 되는 인생을 살기에, 실은 대단히 신중하게 살아야만 앞뒤가 맞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더 나은 선택이 가능한데도 그것을 택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훈수 두는 사람이 더 나은 것같이 보이는데요.
오늘 말씀이 그러합니다. 독서에서는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러 간 사이, 이스라엘인들은 수송아지 상을 부어놓고 빌고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이들은 하느님을 거역했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 선택을 했을까요? 어제 오늘 거론되는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은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 그런 수를 둡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린 더 나은 삶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지 않는 경향이 많은데요, 과연 무엇을 지키고 싶어 그런 선택들을 했을까요? 이 질문은 모두들 삶이 다르기에 여러분 각자가 답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다만 저는 오늘 들려주신 당신의 말씀을 인용해 봅니다. “나는 사람들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주님의 의도도 디지털적인 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디지털적인 면이란, 참 구원을 위해 달려가는 모습입니다. 개인의 자존심이나 욕심을 채우기보다는 먼저 챙겨야 할 것을 해 나갈 때, 낭비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만 절약할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시간과 생각마저도 담백하게 할 때, 나는 유한한 인생을 효과적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