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4주일. 예레 1,4-19; 1고린 12,31-13,13; 루카 4,21-30
간혹 면담을 하다보면 이런 말씀을 듣게 됩니다. ‘제가 남들에게 잘 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물어봅니다. ‘형제님은 자매님은 사랑이 무어라 생각하셔요?’ 그러면 대다수 분들이 어떤 것을 베풀거나, 무엇을 해준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의 질문을 잘못 이해하셨던 모양입니다. 남에게 베풀거나 무언가를 해 준 이야기는, 결과물이지 그것이 사랑 자체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배운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듯 많은 분들이 사랑의 속성보다는, 사랑의 결과물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은데요.
특히 오늘 2독서 말씀이 그것을 알려줍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라면서 사랑의 속성, 사랑을 하게 되면서 발견할 수 있는 느낌을 들려줍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지요. 가지고 싶었던 물건을 사려고 매장에 갑니다. 당연히 눈으로만 보고 끝나지 않지요? 만져보고, 촉감을 느끼고, 쥐었을 때 그립감을 맛보고, 제품의 마무리는 매끈한 지, 그것을 만든 재질 등도 살핍니다.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입에 감도는 어떠한 느낌이 드는 지도 살핍니다. 그러면서 행복해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데이트 한 번 했다고 사람을 다 알지 못하지요. 둘이 만나는 긴 시간 속에서 여러 가지를 겪으면서 ‘이 사람이다’ 할 만한 확신까지 다다르면, 결혼을 하고, 또 새롭게 이어지는 새로운 환경과 적응 속에서, 이겨나가는 방법을 둘이 함께 공유하면서, 그동안 알고 있던 사랑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고 또 다음 코스로 넘어갑니다. 이렇듯 우린 사랑은 한 번이 아닌, 계속 이어져야 함을 알게 되는데요.
오늘 1독서에서 주님은 이런 말씀을 내리십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나를 빚기 전부터 알고 계셨다는 그분의 기억이, 우리의 삶을 감사하게 만드십니다. 잊지 않으시는 그분의 사랑방식이 말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나를 그저 쓸모의 대상으로, 기계 부품처럼 여길 지라도, 당신은 그러지 않으시고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라는 독서 마지막 말씀처럼 그분의 기억하심이 나를 살려주십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에서도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과 좋은 말씀을 들었어도, 믿음에까지는 다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과 한동네 사람이었기에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면서 선입견에 사로 잡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성경에 나왔던 엘리야 예언자와 만난 사렙타 지방의 과부나, 엘리사 예언자가 만나서 나병이 나은 나아만을 언급하십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인물들은 주님의 은총을 만나면서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갔지만, 그들은 주님을 만나고 있으면서도 보고 느꼈던 사안을 그냥 스쳐지나가고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어주는 사랑이 없이 말이지요.
즉, 요즘 말로 바꿔 부르자면 이런 경우이겠습니다. 직장에서 사원에게 일은 맡기지만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은 없기에, 정작 중요한 일은 맡기지 않고 키워주지 않고 허드레 일만 시키는 경우나,계약이 끝나면 사람을 자르고 바꾸기에 여념없는 사람들, 남녀사이에서는 그 사람을 사랑해서 만나기보다는. 자기 필요할 때만 만나는 어장관리의 경우를,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데요. 이 경우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관심이 있어서, 우리를 생각해서 그렇게 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텐데요. 당연히 사랑은 얘기할 수도 없을 것이구요.
사랑하는 목동 본당 교우 여러분~
정작 중요한 사안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해 사랑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 지를 배웠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벌이고 있는 행위는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하고 부족한 경우를 많이 만나는데요. 여러분은 그동안 어떤 사랑을 해오셨습니까? 당신의 말씀을 들으면 이 대답을 해보셔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