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3주간 토요일. 판관 13,2-25;루카 1,5-25
미래는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나의 운명을 다른데 맡겨 보려한다거나, 혹은 불안함에 떨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과거는 모두가 알고 있고, 또 우리보다 한 차원 높은 신령적인 귀신들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점집이나 무당, 아기동자, 왕꽃선녀들도 이 모든 것을 아는 듯 이야기 합니다. 그들이 믿는 귀신의 도움을 받아서요. 하지만 미래는 귀신의 영역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과 우리 사람들이 같이 엮어가는 곳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는 미래를 맞이하는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1독서에서 삼손의 엄마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보라 너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은 먹지마라.” 그동안 아이가 없었는데, 이런 말이 쉽게 믿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 복음에 나온 즈카리야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이런 소리를 합니다.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당연스럽게 그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이성을 넘어선 믿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악마의 장난이라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나의 생각을 넘어선, 미래의 어떤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나 스스로 미래까지 통제하겠다는 행위를 포기하고, 하느님의 역사 안에 같이 동참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어찌보면 이런 행동이 무모해 보이고, 나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지고, 이상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가장 영웅적인 모습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모두가 구원으로 초대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내 생각에 가로막히지 않아야 하는데요.
요즘 점집의 복채가격도 꽤 나갑니다. 그런데 그 비용을 내고 오신 분들의 얼굴이, 그리 밝지 않은 이유는 또 무슨 연유일까요? 주님의 뜻은 쉽게 예상되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속 좁은 우리와 다르구나’ 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린 ‘주님이 내 안에서 어떻게 실현해 주시는가?’ 기다리며 살필 때, 성모님같은 참된 기다림의 신앙이 무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