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3주일 미사.(자선주일).스바니야 3,14-18;필리피 4,4-7; 루카 3,10-18
고해성사는 잘 보시고 계십니까? 고해를 하면 뭔가 가뿐한 마음이 듭니다. 마치 목욕을 하고 난 그런 느낌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모습일까요? 고해소에 있으면 별별 이야기를 다 듣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들어도 시원찮은 세상에, 실상 그 좁은 방에서 들려오는 내용이 상쾌한 내용들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 안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본인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잘못에 대해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여쭤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예정이세요?” 그야말로 모범답안들이 쏟아냅니다. ‘안 그러겠다. 사랑하겠다’ 등등요. 그런데 실상 어떻습니까? 고해소에서 나오면, 몇 시간, 며칠이 지나면 도루묵 인생을 봅니다. 전 여기서 여러분들의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하셨다는 다짐과 실생활과의 건널목의 턱이, 왜 그리 높은 지, 왜 넘질 못하는 지에 대해서 보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 세례자 요한이 설교를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군중도 세리도 군인들도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예전 사람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이렇게 묻는다지만, 솔직히 우리는 다르잖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 ‘안다’ 는 차원을 좀 보겠습니다. 혹시 진짜 알지는 못하고, 안다는 냄새만 맡아본 것은 아니신지요. 마치 맛있는 냄새가 나기에 가까이 다가가지만, 실제로 먹어보지는 못했기에 망설이는, 그런 단계처럼 말이지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깊이는 모르고 단지 ‘어떠한 것이다.’ 라는 정도만 훑었을 뿐인, 그런 단계 말입니다. 그들은 요한의 답을 듣고 실천했을 것입니다. 기대에 차 있었고 그를 메시아요, 구세주라고 여겼으니까요. 하지만 우린 좀 달라 보입니다. 알고 배운 게 많아서인지, 아무리 메시아요, 구세주가 오더라도 힘들것 같다는, 어두운 전망만 내놓는데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지요. 내가 가진 보이지 않는 둔턱을 넘어야 하는데요.
이번 12월 8일을 기점으로 1년간 시작된, 교황님이 쓰신, ‘자비의 희년’ 의 칙서. ‘자비의 얼굴’ 18페이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실 사랑은 결코 추상적인 단어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구체적인 삶입니다. 일상의 행동에서 사랑은 태도와 습관으로 드러납니다...그리스도인의 자비로운 사랑도 바로 이러한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듯이, 자녀들도 그렇게 사랑합니다.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서로서로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목동 본당 교우 여러분
오늘은 게다가 자선주일이랍니다. 나는 어떻게 현실적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께 시간 드리겠습니다. 눈 감아 보시겠습니까? 시간은 1분을 드리겠습니다.......
떠오르는 그 생각을 이제 현실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