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후 토요일. 요한1서 5,14-21; 요한 3,22-30
이제 자기에게 할당된 시간이 끝나갈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요? 이제 자신이 역사에서 물러나야 할 때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저는 가끔 죽음의 맛이 어떤 것일까? 를 여겨봅니다. 개인적으로 죽음의 문턱만 다녀왔을 뿐, 진짜로 죽어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은퇴를 해보지도 않았기에, 어르신들도 계신 자리에 무어라 자신 있게 말씀드리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이런 느낌 아닐까요? ‘제발..내가 할 때보다는 더 나았으면, 더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 아닐까요? 정치가들이라면 ‘내가 정치할 때보다 좀 더 나은 나라가 되길’ 신부님들이라면 ‘나보다 더 나은 신부님들이 나와서 교회와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사목해주길’ 바라는 마음 말이지요. 어쩌면 세례자 요한의 마음도 이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요한은 자기 제자에게서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 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그 자신도 그런 날이 올것이라 예상은 했겠지만, 자기 제자 입에서 그런 소리를 듣다보면 순간 몸이 움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의연하게 대처합니다. “그 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저번 주 예비자 교리의 과목은 성체성사였습니다. 아무래도 미사에 대해 얘기할 수 밖에 없었고요. 그 가운데 ‘강론’ 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었습니다. ‘교우분들은 강론 잘하는 신부님들을 원합니다. 당연합니다. 좋은 소리를 듣고 싶으니까요. 단언컨대 강론은 잘 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강론이 앞서 읽었던 독서나 복음보다 더 두드러져서는 안 됩니다. 강론이란 말씀을 살려주고 풀어주는 역할을 해야지, 읽었던 말씀을 뛰어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라고요. 그래서 오늘 독서의 마지막도 그렇습니다.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당신의 말씀보다 우리 자신이 더 뛰어나고픈 마음마저도 조심해야만 합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가 우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 사실을 알았기에 자기 역할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다음 사람에게 잘 넘겨주는 연습을 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