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3주일

2016. 4. 9. 오후 3: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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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3주일. 사도 5,27-41; 묵시 5,11-14; 요한 21,1-19

  가끔 서로 간에 다툼이 벌어지면 이런 소리를 하거나 들을 때가 있습니다. 너 뭐하는 사람이야?..” 보통은 기분 나쁘게만 들을 수 있겠지만요. 이 말만 놓고보면 간혹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를 내가 제일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즉 되고 싶은 나와, 현재의 나를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는데요. 더 쉽게 말해서,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부활을 3주일 째 맞이하고 있는 이 시국에,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그 부활신앙으로 살고 있는 지, 아니면 여전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살고 있는 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얘기인데요. 이런 얘기를 하려면, 먼저 우리 신앙이 어떻게 흘러왔는지에 대한 역사를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종교는 대대적으로 불교였습니다. 삼국시대 때도, 통일신라 때에도, 고려시대 때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교로 바뀝니다. 누구는 유교가 종교냐?’ 할지 모르지만 분명 사당도 있고, 제사도 지냈기에 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러 신분질서는 와해되었고 토지제도가 문란해지면서 건국이념인 유교는 쇠퇴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면서 유교가 과연 민중의 삶과 사회통합에 적합한가?’ 에 대한 의문이 들면서 미륵신앙, 정감록, 비결신앙이 생겨나고 만민평등사상을 주창한 천주교라는 서학의 유입과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서학에 대응하기 위해 이름 지어진 동학이 등장하는 19세기를 맞이합니다. 이 혼란한 사회를 회복시키고자, 조선왕조는 중국과 일본의 힘을 이용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민중들은 그들이 행한 수탈과 야욕에 상처를 받았고요. 그동안 욕심을 드러내지 않던 미국이 조선을 도와준다는 이유로 조용히 들어옵니다. 하지만 이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천주교를 박해했던 역사를 알고 있었기에, 선심을 얻고자 전기설립을 하고 병원을 세워줍니다. 그러면서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 알렌을 통하여 운산의 금광 채굴권을 얻어냅니다. 운산금광의 채산성은 당시 화폐가치로 4950만원이었고 요즘 시세로 3에서 4조원에 달했다고 합니다만, 알렌은 명성황후를 꼬드겨 미국에 단돈 25만원에 넘기는 데 성공합니다. 그래서 노다지라는 말도 생겨났지요. 설명이 길었습니다만, 우리나라의 그리스도교의 도입은 이처럼 사회의 변혁과 함께 들어왔습니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조선사회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유중에 하나는,태생이 신분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같다는 만민평등사상과 하느님 아래에서 모두가 형제, 자매라는 사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앙의 정체성이 확실했고 그런 사회가 오길 바랬습니다. 헌데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중시하는 현 시점에서 지금의 나는 왜 신앙을 가져야만 할까요?

  그동안 수많은 예비자와 교우들을 만났지만 천주교를 믿는 이유가 겉으로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라지만 실제 많은 경우는 이랬습니다. 현세에서 복 받으며 잘 살기 위해서 라고요. 하지만 교회에서는 한 번도 이렇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알아서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고요. 여기서 자기 영혼을 구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1독서의 사도들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나왔다.” 주님을 증언하여서 반대를 받고 있음을 오히려 좋아라 여깁니다. 일단 신앙의 출발에서부터 우리와 차이가 납니다. 그러기에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나의 구원관은 교회에서 얘기하는 방식과 똑같은가?’ 하고요. 이른바 내 신앙의 정체성을 파악해야 합니다. 만약 차이가 난다면 고민을 해봐야 하겠지요. 언젠가부터 종교란, 내 인생의 부가 서비스처럼 여겼습니다. 하나 있으면 괜찮은 것..하지만 실상 내가 이 곳에 들어온 이유는 나를 구하기 위해서여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교회에서 말하는 것들이 이해되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내 생각에만 사로잡힐 때,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거듭하면서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곳은 그런 곳이 아니니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예전 처음에 당신과 제자들이 만났던 광경을 다시 회상시켜주시며 베드로에게 3번이나 이렇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의 상황이라면 바꿔서 이렇게 질문시겠지요. 너는 너의 꿈보다, 가족보다, 애인보다, 직업보다, 하느님인 나를 더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사명을 위해 살아갈 수 있겠느냐?” 라고요. 내가 진짜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나는 진짜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어야 할까요? 베드로가 .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라고 대답했듯 나도 그 대답을 할 때입니다. 혼자 못하겠다면, 우리 곁에 있는 공동체와 더불어 해 나갈 때에야 말로 이 신앙이 주는 참 기쁨을 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이 질문에 대답을 해볼 때입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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