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0주일. 1열왕 17,17-24; 갈라 1,11-19; 루카 7,11-17
뭔가를 안다는 차원에 접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도 자기 생각이 없으면, 남이 쓴 것에 대해 무의식적인 복습에 불과할 때가 많고요. 몸을 통해 부딪혀 본다 하여도 거기서 뭔가를 깨닫지 못한다면 절정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요. 공부를 많이 해야 살아남는 이 시대에, 이론과 이성을 넘어서는 체험이 있어야만 내가 움직이는 명분을 설명해줄 수 있는 시대라 여겨집니다. 여기서 잠시 제가 체험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전 신부가 되고나서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의 일입니다. 그 날은 기도를 했지만 어떠한 메시지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습니다. 미사 시간은 다가오지만, 뭔가 벽에 부딪힌 듯한 느낌에, 초조하다 못해 절망에 까지 다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미사 시간 20분 전, 갑자기 섬광과 같은 그 무언가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컴퓨터를 켤 시간도 없이 다급하게 메시지가 떨어지는 느낌이었기에 한마디로 놓칠 새라 볼펜으로 종이에 휘갈겨 쓸 수 밖에 없는 다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미사는 잘 마쳤구요. 저는 제가 잘난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기도를 하다가 그 날의 영상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지는 제가 잘나서 그 위기를 넘긴 줄 알았었는데, 다시 돌아보니 그건 당신의 선물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보다 교우들을 생각하셔서 미사가 잘 마쳐질 수 있도록 해주셨고요. 덕분에 저를 위기에서 꺼내주시면서 저를 ‘도구’ 로 삼아 메시지를 허락하셨던 것인데요.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라는 기도 문구를 그 때까지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제서야 ‘도구’ 가 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게 된 때였는데요.
오늘 1독서와 복음에서 사람들을 살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여자의 울부짖음에 엘리야는 움직였고, 가엾은 과부의 모습에 주님은 기적을 베푸십니다. 대다수 사람은 기적이라는 사실에 대단히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만, 실은 이렇지요. 당신은 무엇이건 언제라도 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특별히 좌절과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고통 속에서, 당신이 주시는 선물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보지 않고 무언가가 이뤄지면 으레 내가 잘난 줄 압니다. 내가 능력이 많다고, 운이 좋았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 들여다보는 사람은 오히려 감사함이 솟아나는데요. 2독서에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 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여기서 바오로가 혼자 있는 것을 즐겨 해서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받은 계시가 어떤 것인지를 잘 꼼꼼히 바라보고, 휘둘리지 않으려, 무조건 다른 이와 상의부터 하기보다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평소의 기도습관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인데요.
사랑하는 개포동 본당 교우 여러분
더 나은 신앙생활을 하고 싶으십니까? 더 나은 삶을 만나고 싶습니까? 그 분의 기적은 상대방도 살리지만 그것을 행하는 나 자신 또한 살리십니다. 그렇다면 나를 통해 빚어지는 많은 순간을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록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만의 언어로 말이지요. 어떤 때에는 그 느낌이 우리를 기쁘게도 만들지만, 어떤 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서 오히려 혼란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며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꼭꼭 씹어보며 의미를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이미 나를 통해 많은 기적이 일어났었음을 기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